나의 새벽
나의 새벽
  • 언론출판원
  • 승인 2019.11.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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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다. 이곳과 시차가 반대인 곳에서 하루를 지내고 다시 돌아온다. 하루를 꼬박 새우는 터라, 다음 날이면 피곤에 저려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지내긴 하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여행이다. 그건 물리적인 여행이 아닌 정신적인 여행이다. 그렇게 나는 가끔 새벽에 잠들지 않고 깨어 혼자만의 여행을 한다. 그 새벽 속에서 추억을 쌓는다. 모든 것들이 깊이 잠든 새벽의 고요 속에서 혼자 또는 누군가와 함께 기억을 쌓는다. 이제부터 그 추억들 속 새벽을 하나씩 꺼내 보려 한다.

  나의 첫 번째 새벽은 사랑-고백의 새벽이다. 나는 재작년 12월 24일에서 12월 25일로 넘어가던 새벽, 이른 크리스마스에 고백을 받았다. 그런 날에 고백하면 내가 자기를 오래오래 기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참고 참다 이제야 이야기를 한다며, 그는 긴장한 모양인지 내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저 건너편을 보며 자기의 마음을 전했다. 그 아슬아슬하고 간질거렸던 새벽, 나는 그의 고백에 긍정의 대답을 했고, 그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나를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그때는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가 곁에 있어서, 그가 내게 전했던 마음이 곁에 있어서 나는 겨울도 잊어버리고 그 찬 새벽을 견뎠다. 그날의 새벽이 살아 숨을 쉬게 된다면 꼭 그의 호흡 같았을 것이라고,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며 행복에 잠긴다.

  나의 두 번째 새벽은 우정-위로의 새벽이다. 길고 지루했던 수험 생활을 끝내고 맞이한 첫 겨울의 늦은 밤, 근처 공원에서 친구와 함께 캔 맥주 하나씩을 사 들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수능 얘기, 대학 얘기, 요즘 뜨는 연예인들 얘기 등의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내 눈물에 나도 당황해 ‘내가 왜 울지?’ 하며 눈물을 닦다가 깔깔 웃었다.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휴지를 뜯어와 건네주며 나를 가만히 달래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입시라는 높은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아 느껴지는 압박감, 반복되는 일과로부터 느껴지는 권태감, 그리고 친했던 사람의 죽음, 그런 것들이 한데 꾸역꾸역 뭉쳐 있다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펑 터져버린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내듯 울다가 문득 민망해져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코안으로 밀려들어 온 차가운 새벽 공기가 발끝까지 퍼지자 그제야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실컷 울어 붕어눈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좁아진 시야 사이로 새벽하늘이 새로 떠오르는 태양에게 조금씩 먹혀드는 것이 보였다. 그동안 응어리진 감정을 모두 쏟아냈기 때문인지, 아니면 새로 밝아오는 하루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인지, 이상하게 마음 한켠에서 무언가 꽉 차오르는 듯한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새벽과 내 친구가 나의 묵은 감정을 덜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나의 세 번째 새벽은 나-반성의 새벽이다. 유난히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새벽이 오기 전에 물통 하나를 들고 산책을 나간다. 푸른 여명이 내려앉은 고요한 길 위를 가만히 걷다 보면,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치이고 휘둘렸던 감정들이 가라앉는다. 그 차분한 공기 속에 파묻혀 어둠과 무서움도 잊고 그냥 발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싶어지고 미운 사람들은 덜 미워하고 싶어진다. 오늘은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 나는 늘 받기만 하는 거 같네, 앞으로 표현을 더 많이 해 줘야지. 그 사람이 나한테 왜 그랬을까, 어딘가 안 맞았던 부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 나를 미워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 새벽의 푸름과 적막은 나를 다독여 주었고,  그 몇십 분 남짓의 시간들이 나를 계속 되돌아보게 만들었고 성장하게 했다.

  나를 가슴 떨리게 만들었던 새벽과 쓰러지려는 나를 단단히 잡아준 새벽, 그리고 많은 날들을 견디게 해주었던 새벽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을 깊은 밤, 나는 나만의 새벽에 다시 여행 채비를 서둘 것이다. 나를 한층 더 사랑스럽고 어른스럽게 만들어 줄 새벽을 만나기 위해서.

진다은(유아교육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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