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자 때 기자실에서 바라본 벚꽃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흰색 꽃잎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한참을 더듬어 그 시절로 돌아간다. 눈이 흐리멍텅한 2학년이었다. 밤새워 술을 마시고 게임을 했다. ‘자체 공강’은 빈번했고 성적은 뻔했다. 그때 수습기자 모집 대자보가 내 어깨를 세게 밀쳤다. 정신을 차리니 학생 기자실이었다.
수습기자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술은 마셨다. 대신 함께하는 사람이 달랐다. 학보사 수습기자들이었다. 우리는 취한 와중에 쓰고 싶은 소재를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기자실에서 머리를 맞대 가며 기사로 써 내려갔다. 예술관에서 강의를 마친 뒤 한마관 학생 기자실로 뛰어가는 길이 그렇게도 멀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선배들에게 조언을 받고 싶었고, 허무맹랑한 소재 얘기를 하고 싶었다. 선배는 내 글이 ‘노래하는 것 같다’며 칭찬했다. 그 말을 되새김질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계속해서 듣고 싶은 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들고 가며 내심 또 그 칭찬을 듣길 바랐다.
편집부국장 때 기자실에서 바라본 벚꽃은 조금 무겁게 흩날리고 있었다. 후배가 생겼다. 국어 문법책을 구입해 읽어야만 했다. 생전 처음 펼쳐본 문법책은 나의 국적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편집부국장이라는 직책으로 무언가 가르쳐야만 했다. 후배들 교육은 한 시간이었지만 교육 준비는 세 시간이 훌쩍 넘었다.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속으로 간절히 후배들이 질문을 하지 않길 바랐다. 얕은 지식으로 가르쳤지만 어쨌든 후배들은 성장했다. 그리고 나를 쏙 빼닮은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기특함을 감추려 얼굴을 푹 숙였다. 나는 칭찬에 인색한 선배였기 때문이다.
편집국장 때는 기자실에서 벚꽃을 바라본 기억이 없다. 수습기자 때는 기자실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국장은 뛰어가야만 했다. 국장이라는 자리는 기사만 발간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람들을 대하고 간혹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위치였다. 학보사 내에서 분열이 생기면 내 책임이었고 후배의 오보 기사는 내 잘못이었다. 기자실에 나의 눈물 젖은 휴지가 산을 이룰 때쯤, 후배들은 나를 일으켰다. 기사 발간을 하려면 어쨌든 움직여야 했다. 이렇게 학보를 16번을 발간하니 어느덧 1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월영지의 물을 채운다.
종이 학보의 퀴퀴한 냄새, 스무 발자국도 안 되지만 그 시간이 아까워 뛰어다니던 편집실, 기자들과 지내며 쌓인 술병만큼 나눴던 많은 얘기, 결국엔 이뤄 낸 경남대학보사 홈페이지, 가끔은 너무나도 서글픈 편집국장의 자리.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표현하기엔 그 단어가 초라하다. 그리고 다시는 겪지 못할 감정이기에 아쉬움의 농도가 짙다.
학생 기자 성유진을 예쁘게 포장하여 기자실 한 구석에 숨겨 두었다. 허전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수식어를 찾으러 나가야만 한다. ‘학생 기자’라는 말이 이름 앞에 붙었을 땐 언제나 영광이었고 나를 빛낼 수 있는 최고의 단어였다. 이 단어와 함께했을 때 나는 정말로 행복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