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발밤발밤]가을이 어떻게 오는가
[정일근의 발밤발밤]가을이 어떻게 오는가
  • 언론출판원
  • 승인 2023.09.2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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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사는 중성동 우거에서는 제일 먼저 ‘소리’로 온다. 언제부터인가 창문 밖에서 이런저런 풀벌레 소리가 섞여 들린다. 청맹과니인 나는 그 소리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지만, 소리의 곡조에서 계절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마 그 소리엔 가을의 전령사 귀뚜라미 소리도 담겼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소리는 한여름의 불볕더위에 항거하는 뜨거운 매미 소리와 감정선이 다르다.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소리의 힘으로 가을이 온다.

  가을은 청각 다음엔 ‘촉각’, 즉 전신으로 밀려온다. 피부에 와닿는 바람만 해도 여름과 확연히 다르다. 우기의 습기를 품은 눅눅한 바람이 아니다. 사람을 불쾌하고 짜증 나게 만드는 바람이 아니다. 말 그대로인 ‘삽상’(颯爽) 한 바람이다. ‘시원하게 불어와 마음이 아주 상쾌해’지는 바람이다. 문득 바람이 오는 곳이 궁금해진다.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다 보면 누군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가을은 거부할 수 없는 ‘향기’로 온다. 여름 장마철 물비린내와 다른,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진 밥에서 나는 내음 같은 구수함이 담겨 찾아온다. 이름하여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계절이 아닌가. 잘 빚은 포도주 한 잔을 들고 향기의 깊이를 음미하듯 가을의 내음을 가슴으로 맡아 본다. 좋은 가을에는 맑은 물 내음이 난다. 어머니의 정화수 같은, 밤새 밝은 달이 와서 놀다간 듯한 그 내음 그 향기다.

  가을은 ‘맛’으로 온다. 웅숭깊은 맛이 그러하다. 여름에 마시던 찬물과 가을에 마시는 찬물은 그 맛이 다르다. 여름 찬물은 갈증을 잠시 풀어주지만, 가을 찬물은 지친 몸에 긴장감까지 선물한다. 반응하는 몸이 단숨에 뛰쳐나갈 것 같다. 팽팽한 즐거움을 주는 맛이 그런 맛이다. 요즘 포도알마다 맛이 그득해지듯 손을 내밀면 과육마다 가을로 가득 차 있다.

  가을은 눈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색깔’로도 온다. 원색의 여름에 지친 두 눈에 평화를 느끼게 한다. 여름의 열정적인 색깔이 익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익어간다는 것이 저리 충만한 빛이다. 남보다 앞장서려는 욕심이 아닌, 남을 가르치려는 허세가 아니다. 그 곁에 나란히 서고 싶은 빛으로 가을이 온다. 그런 시간엔 그 빛깔과 동무해서 먼 길을 함께 걸어가고 싶어진다.

  밤에는 별이 가을로 찾아온다. 식민지의 동주 시인이 그랬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시인은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했다. 이런 밤은 우리도 청년 동주의 곁에 서서 별을 헤아리며 가을을 만나고 싶어진다. 별을 모아 가을의 시편들을 읽어주고 싶다.

  나의 청년들이여. 가을을 만나기 위해서 닫힌 오감을 열자. 아니 육감까지 활짝 열어 가을을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맞이하자. 지난여름이 얼마나 혹독하였는지 우리는 잘 알지 않는가. 지금 이 시간, 올가을을 가장 찬란하게 맞이할 시간이다.

석좌교수, 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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