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자 원고지는 사라진 것일까? 가로로 20칸, 세로로 10칸의 사각형에 펜을 잡고 글을 한 자 한 자 써서 채워 넣던 시절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전업으로 글을 쓰는 필자에게도 이제는 어디든 200자 원고지로 원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200자 원고지를 대신해 A4 크기의 백지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컴퓨터 한글 파일로 글을 찍으면 다양한 문서 정보까지 제공되는 이 편한 시대에, 200자 원고지 타령은 ‘꼰대’라는 소리를 자처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펜을 잡고 글을 쓰던 ‘수공업 시대’서 ‘컴’이나 ‘폰’의 자판으로 글을 찍어대는 ‘속도의 시대’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엄지족’은 오래된 유행어지만, 나날이 세를 떨치고 있다. 휴대폰의 기능이 문자에서 카톡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휴대폰 액정 속 세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엄지족이라 부른다. 대화보다 메시지를 더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자메시지나 톡의 내용을 보낼 때 왼손,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재빠르게 사용하기 때문에 ‘엄지족’이라고 한다. 이는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하다.
세기 초 엄지족은 주로 청소년을 지칭했으나 지금은 60을 넘긴 베이비붐 세대까지 엄지족 대열에 가담하고 있을 정도다. 대부분 대화보다 문자나 톡으로 대신하고 있으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의 소중한 도구인 ‘말’이란 것이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어느 미래에는 언어 대신 문자만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
연필이나 볼펜으로 글을 쓰던 시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나미 볼펜은 1963년에 만들어져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성장하며 우리의 대표 볼펜으로 자리 잡았다. 연필과 볼펜을 꽉 잡고 글을 썼던 필기의 시대는 앞으로 박물관에 가야 만나는 것은 또 아닌지. 볼펜을 잡고 글을 쓰다 보면 생기는 가운뎃손가락의 ‘펜 혹’은 영광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상처가 되어버렸다.
엄지와 검지로 볼펜을 잡고 글을 쓸 때 가운뎃손가락으로 펜을 받치게 된다. 그러한 오랜 글쓰기는 가운뎃손가락에 굳은살인 펜 혹을 만들었다. 그땐 전국의 학생들 손에 펜 혹이 생길 정도였다. 글을 많이 쓰는 직업군에서는 펜 혹이 글쓰기에 고통을 줘서 날카로운 면도칼 같은 것으로 잘라내며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최근 일군의 시인들과 육필로 쓴 시를 전시하며,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원고지에 글을 썼던 시인들의 필체가 반듯반듯하면서 개성적이란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200자 원고지 사각 안에 글을 쓰다 보니 글체가 그 사각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둥글어지고 절제되면서 나름대로 글체를 만들어주었다.
요즘 청소년들과 대학생들마저 악필이 되는데 원고지가 사라진 영향이 클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적어도 필체가 형성될 때까지 초, 중, 고에 200자 원고지를 부활시켰으면 한다. 그 덕은 대학에 가서, 나아가 사회에 나가서 톡톡히 보게 된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다. 예부터 사람의 글도 신체와 말, 판단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대접해왔기 때문이다.
석좌교수, 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