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 동원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일제 강점의 역사를 기억하며,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으로 참된 역사 청산을 이루겠다는 350만 도민의 뜻을 담아 이 상을 세우다.” -일제 강제 동원 노동자상 건립 비문-
지난 1일 128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아 경남 창원시 의창구 용호동 정우상가 앞에서 ‘일제 강제 동원 노동자상’ 제막식이 개최됐다. 창원은 서울 용산역, 인천 부평공원, 제주 제주항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세워졌다. 경남 건립추진위원회는 노동자상을 세우며 일본 강제 노역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고자 했다. 제막식에는 노동자들의 유족, 관계자들, 건립 기금 200만 원을 기부한 무학여고 학생들 등이 참석했다.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었다
제막식의 마지막 순서는 마산 출신인 유창환 작가가 제작한 노동자상의 공개였다. 사람들은 숨죽여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베일을 벗기는 손끝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들의 귀엔 자동차 경적조차 들리지 않았다. 베일이 벗겨지고 그제야 꾹꾹 억누르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노동자상 주위에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와 탄식 소리로 가득 찼다. 유족들은 아직 시신조차 어디 있는지 모를 가족들을 떠올리며 땅을 내리치고 동상을 어루만졌다.
동상은 남자 노동자상, 소녀상, 소년상 3명이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모습이다. 남자 노동자상은 곡괭이 자루를 거꾸로 뒤집어 그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칠흑같이 끝없는 고된 노동에 그의 몸은 앙상히 말라간다. 소녀상은 오른손으로 보따리를 들고 왼손으론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자유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소년상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소녀상보다 더 어려 보이는 소년의 모습에 마음이 더 저려온다. 셋 다 맨발로 땅을 디디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유창환 작가는 남자 노동자상에 굳게 다문 입술과 결의에 찬 눈빛을 표현해 시대의 아픔과 극복하겠다는 맹세를 드러내고자 했다. 남자 노동자상의 눈빛엔 모국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 있으며 곡괭이는 강제 노동에 대한 봉기, 분노 등을 나타낸다. 소녀상에는 미해결의 합의, 보상 문제, 자기 치유의 응어리를 담아냈다. 그녀의 손끝엔 애절함이 가득하고 가녀린 몸짓엔 반인권, 반윤리적 역사가 담겨 있다. 보따리는 빼앗긴 명예와 인권의 자기 저장소를 뜻한다. 소년상은 부모의 얼굴과 생사를 모른 채 고된 생을 꾸리는 이들을 나타낸다. 소년의 눈물은 대한민국의 통곡과 같으며 배에 가지런히 올린 오른손은 예법을 나타낸다. 유 작가는 아픔을 담아내면서도 굳게 디딘 소년의 발을 통해 미래의 희망 역시 표현해 냈다.
*여전히 울부짖는 노동자상
일본 우토로 마을이 무한도전에 방송되고 군함도(하지마 섬 탄광)가 작년에 영화로 개봉했다. 사람들은 이전에 몰랐던 일본 강제 노역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잊혀 가는 역사를 재조명하며 일본에 사과를 요청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은 사과는커녕 모르는 일이라며 시침을 떼고 있다.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강제 노역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노동했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노동자상은 그런 일본의 태도 앞에서 여전히 울부짖고 있다. 노동자들의 슬픔을 덜어 주기 위해선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 제막식 타이틀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인 이유이다.
부산에도 창원과 같은 날짜에 노동자상이 설치되었다. 부산 노동자상은 일본총영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바로 옆에 설치하고자 했으나, 정부와 부산시, 동구청은 일본총영사관이 아닌 인근 정발 장군 동상 부근이나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 동원역사관에 세울 것을 요구했다. 결국 일본총영사관 앞에 설치했지만, 31일에 강제 철거되었다. 예전에 소녀상과 같이 시민단체와 경찰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충돌은 20분간 계속되었다.
아직 일제 강제 노역에 끌려간 노동자들은 생사조차 불투명하다. 살았다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죽었다면 유골은 대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아직도 그들과 유족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고국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도는 그들에게는 정확한 ‘역사’란 이정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