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의 굵직한 저서로 이름이 높은 정치 철학자이다. 한국에서는 이 세 책은 물론이고 박사학위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까지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인기는 단지 학문적 성취만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안온한 상아탑 속의 철학자가 아니라 가혹한 현실에 마주하여 자신의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맞섰던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히틀러의 나치가 없었다면 서양 철학 연구에 몰두하는 아카데믹한 학자가 되었겠지만, 그 시대는 그녀에게 순탄한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수용소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한 그녀는 뉴욕의 허름한 월세방에서 무국적자로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현실에 대한 긴장과 철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의 출세작 『전체주의의 기원』은 자신이 경험한 나치의 폭정을 정치 철학의 개념과 이론으로 분석한 저작이다. 그녀가 해명하고자 한 질문은 문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사회 과학과 과학 기술에 이르기까지 근대 문명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독일인들이 왜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그토록 잔혹한 일을 저질렀나 하는 것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나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지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히틀러 개인에게만 화살을 돌리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을 면하려는 기회주의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더 나아가 한나 아렌트는 자신의 동포인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직언을 피하지 않는다. 유대인들도 나치의 등장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침묵과 묵인으로 방기했고 심지어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나치를 이용하려까지 했다는 사실을 적시하였던 것이다.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책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은 현실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독일의 정치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도, 또 유대인들까지도 자신들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기 때문이었다고 역설한다. ‘나는 괜찮겠지’, ‘설마 내가 그렇게 되겠어’라는 현실 회피가 ‘히틀러쯤이야’, ‘별거 아닐 거야’라는 무책임한 오만으로 연결되어 그 큰 비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의 총구가 자신에게 들이닥쳤을 때에는 이미 늦어버렸기에 만행과 참상의 희생자가 되거나 동조자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면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 체제는 언제든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가 우리에게 한 간곡한 부탁이다.
조정우(사회학과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