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문 입선: 윤병헌(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3)
방과 후
호수를 하수구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버렸다. 선물 받은 도시락을. 폭탄이 들었을까 봐. 이런 내 마음 아시나요. 알긴 뭘 알아. 흑판만 바라보는 중이다. 나는 학생이니까. 학생은 배워야 하니까. 잘 배우고 싶어서 잠을 잤다. 누군가 흔들어도 절대 깨지 않았다. 그게 문학을 배우는 자세니까. 오늘은 등나무와 악수하는 법을 배웠다. 등나무와 악수하려면 등나무를 믿으면 안 된다. 등나무가 우리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덩굴손과 악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씻는데 믿을 수 없는 양의 흙이 씻겨 나왔다. 손을 다 씻으니 손이 없어졌다. 이게 뭐지? 말했는데 입에서 단내가 났다. 아, 나 오늘 처음 말했구나. 궁금해서 입을 열었구나. 그게 무섭다. 입만 벌려도 경악하는 자세가 된다. 거울을 보면 팔에서 자라나는 작은 새들. 이걸 버릴 수가 없다.
제3회 3·15청년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40년 넘게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대학생들의 현상작품공모를 맡아본 경력이 수십 년이다. 심사평도 얼마나 많이 썼던지 그 횟수도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대학생들의 응모작품을 읽는 일은 언제나 신선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늘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그들이지만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그들의 일상과 사고, 관심, 방향성, 가치관 따위를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멋진 기회이기 때문이다. 무릇 세상은 언제나 청년들의 전위적 사상과 행동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렸고,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젊다는 것은 그만큼 박진감, 적극성, 역동성, 미래지향성 따위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청년문학상에 대한 기대와 관심도 예외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반독재 민주화를 실천하려 했던 3·15정신의 계승과 관련된 그 어떤 실감이 확인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어가는 순간 심사자의 마음은 줄곧 어둡고 침울했다. 3·15와 관련된 어떤 실감도 예증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시 작품들이 바탕에 깔고 있는 기본은 요설(饒舌), 냉소(冷笑), 무감각(無感覺), 무방향(無方向), 무전망(無展望) 등이었고, 청춘의 열정이나 포부, 건강성이 느껴지는 정치감각, 현실의식 따위가 발견되지 않았다. 심사자의 기대가 너무 컸던 지도 모르겠다. 이런 작품들만 대면하게 된 것은 사실상 시인들의 책임이 크다. 청년 독자들이 그들이 삶을 독자적으로 힘겹게 펼쳐가는 일에 시가 하나의 힘과 격려, 혹은 위로의 도우미 구실이 되었어야 하는데 문단 현실이 늘상 지리멸렬했고, 예나 제나 예술성이란 이름의 시적 몽롱과 언희(言戱)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이 보고 배울 마땅한 대상이 없었던 점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심사자는 어렵게 한 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골랐다. 하지만 거기에도 많은 주저와 고민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은 「수보보다(свобо́да)」. 이 말은 우크라이나어로 ‘자유’를 뜻하는 단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구시대적 전쟁논리를 정당성으로 내세우며 세계를 다시 전쟁과 혼돈의 분위기로 휘몰아 넣고 있는 러시아와 푸틴의 폭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전쟁이 빚어내는 전형적 특징이자 현상인 파괴, 살상, 이산, 유린, 피란의 반인간적 잔혹성에 대한 근원적 비판에서 출발한다. 마지막 결구인 ‘창백한 세상에 핏기가 돌고 있었다’라는 단 한 줄이 이 작품 전체를 구원하고 있다. 시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구원의 통로를 필연적으로 끼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응모자의 다른 작품들, 이를테면 「독백」, 「면담」 등의 전개방식에는 전혀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당선작과 비교해볼 때 수준의 굴곡과 편차가 심하게 느껴진다. 시는 요설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명심해야겠다. 이런 점은 가작으로 선정된 「방과 후」의 제출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목적성, 방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는 생각처럼 손쉽게 성취되는 가벼운 세계가 결코 아니다. 모든 응모자들은 한국현대시문학사를 19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 작품 중심으로 정독하고 깊이 있게 성찰하는 공부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3·15문학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멋진 작품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부득이 다음해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든 응모자의 정진을 빈다.
심사 위원: 이동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