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의 역사, 기억해야 할 이야기
40여 년의 역사, 기억해야 할 이야기
  • 정희정 기자
  • 승인 2021.05.21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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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하 치안감과 민족민주화대성회
                                                                                                    /사진 제공: 5·18 세계기록유산 아카이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역사를 공부하면서 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에는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거나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 허다하다. 민주주의 꽃인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경찰로서 의무를 끝까지 다한 안병하 치안감과5·18의 서막을 이루어낸 대학가의 운동에 대해 알아보자. / 사회부


  후환이 두려워 옳지 못한 행동임에도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어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설령 도덕적 가치를 벗어나는 일이라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합리화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러한 절대복종의 대표적인 예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의 무능’이다. 생각의 무능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나타났다. 5·18 민주화운동에서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눈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시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경찰’로서 걸맞게 명령 불복종한 안병하 치안감이 있었다. 안병하 치안감은 당시 전남경찰국장이었다.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하여 직위해제를 당했다. 혹독한 고문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그의 죄는 ‘직무유기혐의’였다. 별세 후에도 그는 무능력한 경찰이라 낙인찍혔고 그의 유족은 5·18 당시 경찰관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안 치안감의 명예는 유족의 피나는 노력으로 2005년서울국립현충원으로 유해인장, 2006년 국가유공자 등록, 2007년 치안감으로 추서되며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

  5·18 민주화 운동 중 계엄군의 강경 진압 속 시민들은 끊임없이 죽어갔다. 그러나 안 치안감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군인이듯,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는 신념 아래 전남경찰국을 지휘했다. 시위 진압에서도 ‘평화 시위 유도와 방어적 진압’을 지시하며 시민 보호에 앞섰다.

  계엄군의 강경 진압이 유지되자 시위대는 광주에서 멈추지 않았다. 5월 21일 계엄군 집단 발포를 기점으로 목포, 화순, 나주, 영암, 강진, 여수,곡성, 무안, 구례 등 전남 전역으로 퍼짐과 동시에 저항 또한 거세졌다. 강진에서는 당시 방위병 김 모 씨가 은닉한 다량의 총기를 확보했으며 목포에서는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그 누구도 총을 소지하지 않은 채 ‘경찰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눌 수 없다’라는 신념을 지켰다. 목포경찰서 습격 당시 경찰서장 이준규 총경은 경찰의 무력 대응을 막았다. 또, 시민을 향해 발포하지 말라는 내용의 구내 방송도 함께 진행했다.

  신군부는 경찰 또한 총기를 이용해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안 치안감은 모든 총기를 군부대에 반납하라 명령했고 이에 일부 경찰서장은 군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총기를 숨겼다. 군의 강경 대응에 분노한 시민들이 경찰서를 습격할 때에도 경찰은 ‘시민에게 발포하지 말 것’, ‘경찰의 희생은 있어도 시민의 희생은 없을 것’을 최우선적 원칙으로 삼았다.

  신군부에 대한 반항의 대가는 혹독했다. 1980년 안병하 치안감 직위 해체, 목포경찰서장 이준규 총경 파면, 화순경찰서장 안병환 경정 외 10인 의원면직, 전남경무과장 양성우 총경 외 21인 감봉 및 견책 조치 되었으며 그 외에도 전남경찰국소속 31인 계고, 12인 전배 조치가 내려졌다. 거기에 더해 안병하 치안감, 이준규 총경 등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전남작전과장 안수택 총경 등은 ‘폭도를 빼돌렸다’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군인에게 구타를 당했다.


● 쓰레기통에도 장미꽃이 피기를

  이후 아시아 곳곳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기반이 된 5·18 민주화운동은 1979년 10월 26일 유신의 심장이 멈춘 후, 이상한 기류가 정치권에 흐르며 시작됐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 체제는 국민의 자유를 억눌렀다. 체제에 반대하며 일어난 부마민주항쟁과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사태를 거치며 비로소 유신이 철폐되었다. 유신 철폐 이후 국민들은 민주화를 꿈꿨다. 당시 이 시기를 이른 바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다.

  10·26 사태 이후 현행 유신헌법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3개월 이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 후 직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야는 11월 26일 만장일치로 국회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어 12월 6일에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군사반란으로 인해 다시 군부독재가 시작됐다.

  전 소장으로 인해 다시 군부정권이 들어설 것을 걱정한 대학생들은 앞서 이어왔던 항거의 화살을 정치투쟁으로 돌렸다. 1980년 5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서울 지역 대학들이 연합한 대학로정치투쟁은 13일간 각 대학별 시위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학생들의 분노는 5월 15일 서울역 집회로 분출되었다.


● 5·18 그 서막과 끝

  민주화 운동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곳곳에 퍼져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5·18 민주화운동 또한 그렇다. 5·18 민주화운동의 서막에는 전남에서 5월18일 이전에 이루어졌던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존재한다. 민족민주화대성회는 독재를 반대하기 위해 시민과 학생이 횃불을 들고 분수대에 모인 항거로 잘 알려져 있다.

  1980년, 전남에서는 전남대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어용교수 퇴진 등 학원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5월 8일부터 민족민주화대성회라는 이름으로 교내 반군부 집회를 개최하였다. 일주일간 이어진 민족민주화대성회는 교내 집회 마지막 날인 5월 14일 광주 시내로 진출하였다. 5월 14일부터 시작된 민족민주화대성회는 16일까지 이어졌다. 사흘간 이어진 집회는 전남대생 외에도 조선대생이나 광주교대생 등 광주 지역 대학생과 교수, 시민을 포함해 약 2만 명이 참여했다. 그 중에도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가 중심이 되었다. 5월 16일 집회가 끝에 다다르자 박 회장은 분수대에 올랐다. “제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며 시작된 박 회장 생애 마지막 연설을 끝으로 그렇게 장장 사흘간의 민족민주화대성회는 끝이 났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후 국내 민주화 운동뿐만아니라 필리핀 등 아시아권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희생과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유네스코 기록물로 등재되었다. 또, 희생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수 있도록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법을 제정했다.

 


  1980년 5월, 외신기자를 통해 알려진 그날의 이야기를 아직 우리는 잘 모른다. 어느 지역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그들이 총을 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피를 흘렸는지.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면서까지 평화를 지키려 했는지.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을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이 조금이나마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고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5·18과 더불어 3·15와 부마민주항쟁 등 국가를 위해 애썼던 이들의 처우도 더 늦기 전에 개선되어야 하고 관련법도 제정되기를 기대한다. 군사 독재를 끝내기 위해 노력한 5·18 유공자를 기리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들도 재조명되어 대중의 기억한편에 자리하기를 바란다.

정희정 기자, 이승근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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