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대에 재직하게 된 후로 매년 1학기에는 ‘현대 비평의 이해’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이 과목은 낯설지 않으면서도 강의를 할 때마다 제일 부담이 가는 과목이다. ‘비평’이라는 말은 영역도 모호하고 용례도 다양하여, 준비하기에는 까다로운 과목이기 때문이다. 비평은 문화 비평, 미술 비평, 예능 비평, 영화 비평 등 다양하게 쓰고 있는 말이며, 이론적 성격이 강하여 철학적 훈련이 필요한 것도 부담스러운 점이다. ‘비평’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잘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나를 알고, 타자를 알고, 사회를 알고자 하는 공부이다.
그런데 이런 이론적 해석이나 비판은 눈에 보이는 성과와는 상관없는 ‘사유’의 영역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수치’나 ‘통계’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 마음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통계의 숫자와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되는 대학 사회에서 불필요한 것으로 논란을 일으키기 일쑤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강의를 하는 나 자신도 점점 이게 왜 필요할까, 학생들의 시간을 괜한 생각 놀음에 허비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학령인구가 나날이 줄어들고, 대학은 취업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잡기에는 벅찬 전공 분야의 중심 과목이다. 따라서 3월을 준비하는 과정은 항상 곤혹스러움과 마주하기에 복잡한 마음이 된다.
하지만 3월은 이런 나의 의구심이나 고민을 한방에 날려 버리는 경험을 주는 달이기도 하다. 곤혹스러움을 딛고 강의실에 들어서서 ‘비평’은 나와 타자가 공존하는 사회를 해석하고 비판하는 사유의 영역임을 들떠서 이야기하노라면, 고민과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을 발견하고 덩달아 휘말려 간다. 그리고 강의실은 순식간에 이상한 기운을 내뿜는다. 더 좋은 삶을 희망하는 열정 같은.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은 당장 어떻게 쓸모 있을 것인가와 관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이 잘 안 풀리고, 누군가 힘들어하고, 무엇을 해결해야 할 때, 버티는 ‘힘’과 관련된다. 사태를 해석하고, 근원을 따지고, 속임수의 유무 혹은 그 논리를 따지는 동안 우리는 갈등적 상황을 걸어 나와 자유롭게 그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결국 해결을 위한 행동이나 사건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 삶의 결정적 상황은 이 기다림의 시간을 버티느냐, 버티지 못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버티는 자, 시간의 변덕스러움과 그로 인한 불안을 느긋하게 흘려보낼 수 있는 자, 그가 마지막에 다다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상식이기도 하다. 인문학, 혹은 비평적 사유는 바로 이 힘과 관련되는 우리 마음의 일에 관여한다. 고민하면서도 호기심으로 빛나는 학생들의 눈을 통해 올해 3월도 나는 무사히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이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놓고 오늘도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강의실을 서성댈 수 있다. 그리고 즐겁다.
이선미(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