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원 칼럼] 어느 날, 지금 이 순간이 깨어날 것이다
[교직원 칼럼] 어느 날, 지금 이 순간이 깨어날 것이다
  • 언론출판원
  • 승인 2018.04.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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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끔 시간의 아득함 속에서 나를 바라볼 때가 있다. SF 영화 속에서, 때로는 박물관의 유물 속에서 가끔은 오늘을 정의내리기 어려운 나의 모든 시간들이 하나로 겹쳐진다.

  내게는 멋진 친구들이 많다. 젊은 시절, 우리는 방학 때마다 뭉쳐 어디든 떠났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인기를 끌던 시절에 그 책을 따라 예산 수덕사를 답사했다. 입석 기차 구석에 배낭을 내려놓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 복사해 온 자료를 읽고 답사 일정표를 맞추던 자유의 시간은 언제나 달콤한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우리에게 수덕사는 시인이나 스님이 아닌 신여성 운동가 김일엽을 생각하게 하는 장소였다. 그날 옛날식 수덕여관에서 하루를 쉬었다. 그 집에는 한국 현대 미술사의 획을 그은 이응로 화백의 사연 많은 첫째 부인이 할머니가 되어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방에 앉아 있었다. 여관 뒤뜰에서 이응로의 문자 추상화를 새겨 놓은 큰 너럭바위를 보고 숨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환호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산 문창문화연구원에서 김태신이라는 화가를 만났다. 그는 한국 인물화의 대가 이당 김은호와 일본 최대의 인물화가인 이토 신스이의 문하생으로서 한·일 양국의 최대 인물화가의 맥을 이은 사람이다. 자서전 『라훌라의 사모곡』의 주인공인 그는 일엽 스님의 아들이었다.

  또 지난 겨울, 서울 반야로차도문화원에서 독립 운동가 효당 최범술의 생애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효당의 독립 운동사에 김태신이 또 등장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정신이 환해지는 경험을 했다. 모든 경험은 응축된 기억으로 존재하다가 순간의 의식 속에서 깨어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경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경험은 당당하게 자기 앞의 시간을 감당한 사람들이 쓴 역사였다.

  요즘 가야산 해인사의 최치원 문화경관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장을 답사하고, 조선시대 선비들의 가야산 유람록 속에서 최치원의 흔적을 찾고, 『보장 천추』의 저자인 종현 스님을 직접 만나기 위해 대구의 도림사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름이 잘 알려진 어떤 분이 사실 고증에 대한 노력도 없이 최치원 친필 운운하며 시석(詩石) 하나를 문화재로 등록하려다가 해인사 스님들로부터 제지를 당한 사건도 알게 되었다.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나의 발자취가 기억에서 깨어나는 순간의 모습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존재의 가치는 순간순간을 진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인 시간의 무게와 같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노성미(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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