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시월이 아프게 지나갔습니다. 박정희 유신 시대에 대학을 다닌 ‘분노할 줄 아는 세대’에게 시월은 독주(毒酒)와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경남대학로 7길’에 주소를 둔 우리 대학 역사에 이 시월이 만든 ‘10·18일’이란 이정표가 있습니다. 한마인이라면, 10·18은 높이뛰기 선수 앞에 놓인, 반드시 도전해야 할 ‘가로대’(bar)와 같습니다. 반면 이 시월에 떨어뜨리지 않고 넘어야 하는 벽이기도 합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도교육이 금기시했던 현실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창비’와 ‘문지’란 문학의 양대 산줄기를 올라갔고 ‘김지하’란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대학이란 높은 산에 올라 새로운 역사와 사회의 부감(俯瞰)을 보았습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판도라 상자를 대학에 와서 열어 보았던 것입니다.
제우스의 지시로 만들어진 여자 인간 판도라가 신이 열지 말라는 지시를 어기고 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그러자 온갖 재앙들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졌고, 마지막엔 상자 속에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상자입니다. 저는 그때 판도라의 상자 맨 마지막에 세상에 남을 희망이 ‘문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이길 꿈꾸었습니다. 제 문단 이력을 정해놓고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운명을 제 손금에 새기며 헤쳐 나갔습니다.
현실에 참여하면서도 인생의 ‘에스키스’로 그려놓은 문학의 밑그림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백일장 시대를 거쳐 대학 문단이 실력을 겨루는 대학 문단 현상공모 등에 제 작품을 보냈습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을 저 스스로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 시간이 습작 시대였으며, 문학이란 대항해를 앞두고 떠돌았던 청춘의 표박(瓢泊)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시를 투고해 신인으로 발표한 지면은 당시는 무크(부정기간행물)였던 <실천문학>이었습니다. 통권 5호. 선명한 붉은 표지였습니다. 1980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서 발행한 진보적 문학지 성격의 잡지였고, 고은, 박태순, 이문구, 송기원, 이시영 선생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습니다. 통권 5호는 이문구 선생이 발행인이었고 송기원 선생이 주간이었습니다.
그 <실천문학>이 제 시 ‘야학일기’ 등 7편의 시를 신인 작품으로 뽑고 시인이란 이름표를 공식적으로 달아주었습니다. 그날이 1984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그날이 제 등단 연월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 10월 1일로 등단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만(滿) 40년 동안 14권의 개인 시집을 펴내며 시인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이후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졸업하기 전인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란 시가 당선, 대학 입학 후 제가 세워 출발해 목적지에 닿았습니다만 목적지가 결코 종점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더 큰 세계로 나가는 경쟁과 생존의 환승장일 뿐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마흔 해가 흘러갔습니다. 올해 시월도 10·18을 지났습니다. 또한 등단 40주년도 지나왔기에 저에게 시월이 더욱 아파 그루터기에 적바림으로 남겨둡니다.
석좌교수, 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