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식년을 맞아 머물렀던 대학교는 ‘Case Western Reserve University’라는 곳이었는데, 이름이 너무 길어서 CASE, 혹은 CWRU라 부르기도 한다. 노벨상 수상자를 17명이나 배출한 사립명문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낯설다. 아마도 이 학교가 위치한 도시가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지역이 아닐 뿐더러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학이라는 요인이 큰 것 같다. 나는 등록금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시원하고 공기가 맑은 곳을 선호하기 때문에 이 학교를 꺼릴 이유가 없었다. 2020년에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굳이 클리블랜드까지 와서 심장 수술을 받은 이유가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이곳의 심장센터가 26년 연속 심장 수술 부문에서 1위를 기록한 곳이라고 하더라. 혹시 본인이나 가까운 지인이 심장이 안 좋은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 학교는 의학과 공학, 법학, 경영학, 인지과학 등의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며, 특히 생의공학(Biomedical Engineering)은 미국에서 6위로 평가받고 있다.
하루는 나를 초청해준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며 강의실에 앉아 있는데, 한국인인 나에게는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식사 때도 아닌데 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수업을 듣는 학생도 있었고, 교수님 몰래 노트북으로 만화를 보는 학생도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모양새가 신기했다. 강의 순서가 끝나자 학생들은 너도나도 스스럼없이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에게는 발표와 토론의 비중이 더 높은 것이 불편하고 적응이 잘 안 되었다.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려면 굳이 대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어찌 되었든, 이러한 수업 방식이 가능한 것은 이 대학의 특징 중 하나인 ‘SAGES’라는 프로그램의 영향이 크다. SAGES는 모든 학생이 입학 뒤 3년 동안 참여해야 하는 읽기와 쓰기를 포함하는 의사소통 기법에 중점을 둔 세미나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학생은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탐구하는 방법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하여 자신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소통하는 능력도 갖출 수 있게 된다. 경남대학교를 예로 든다면 글쓰기와 의사소통 과목들이 전공과 융합 전공 깊숙이 파고들어온 형태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구성하고 표현하면서 지식과 지식의 소통 능력을 동시에 확장시키는 방식은 처음에는 느린 것 같지만 전공의 심화와 융합 과정에서 시너지를 창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둔다.
이 대학에서는 약 95개의 학부 과정과 140개에 가까운 이중 학위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를 융합하여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 100개 이상의 연구소에서 학부생들도 연구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정해진 문제 유형과 정해진 틀에 길들여질수록 좋은 평가를 받는 한국식 교육과는 반대로 본질에 대한 탐구와 소통 능력을 무기로 하여 새로운 틀을 만들고 융합해 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우리가 넘어서기 어려운 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곳을 다녀온 후에 국어교육과 국어학계에서는 아직 낯선 언어습득이라는 분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할 수 있었고, 대학원의 한국어교육전공과 학부에 관련된 과목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 CWRU와 경남대학교는 위치한 도시의 규모도 비슷하고 교양교육과 융합교육을 중요시 한다는 점도 닮았다. CWRU의 장점을 배우고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 보면 좋을 것이다.
정병철(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