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은 러시아와 조선 사이 최초의 조약인 러-조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서명은 양국 간 외교, 경제-통상, 문화 교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서울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 고종황 제와 러시아 공사인 K.I. 베베르 간에 형성된 관계의 역사는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의 남쪽에 자리한 러시아 영사관에 대한 자료는 사실상 거의 찾기가 힘들다. 작년 우리는 (주부산 러시아 총영사관) 1903년부터 1923년까지 활동한 주부산 러시아 부영사관의 역사에 대한 몇 편의 글을 발표했다. 우리는 제정 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던 사료들을 지속적으로 연구하였고 그에 기반하여 러시아가 한국의 남쪽, 마산포(오늘날 의 마산)에 개관하였던 첫 영사관에 대한 글을 준비하였다.
1899년 마산포 항구는 수출입을 위해 개항되었다.
러시아 해양부가 마산포에 조계(거류지 거주 권한) 획득을 계획함에 따라 바로 이 항구에 러시아 부영사관 설치가 결정되었다.
1899년 주한 러시아 공사관 주임 E.F. 쉬테인은 러시아 해양부와 영사관 건물을 위해 마산포에 부지를 획득했다. 약 15,000㎡ 면적인 영사관 부지는 영국과 일본 영사관 부지와 가까운 곳에 있던 언덕의 해안가에 위치했다. 당시 일본 영사관 부지에는 이미 임시 영사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1900년 3월 21일(구력, 8일) 주한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 외교부에 서울에 있던 부영사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소코프를 마산포 주재 러시아 제국 부영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공식서한을 보냈다. 마산포 부영사의 업무는 부산항과 목포항 주변 지역의 업무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1900년 9월 14일(구력, 1일)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인 S.V. 소코프는 일본인 오카모토 이자미와 마산포에 러시아 부영사관 건물을 건축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오카모토는 부영사관 부지에 마산포 주재 러시아 제국 부영사관 건물을 건축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석조 기단 위에 세워질 2층짜리 벽돌 건물, 주방과 하인들을 위한 엷은 널빤지로 덮은 1층짜리 일본식 건물, 통역사를 위한 한국식 건물을 짓기로 했다. 2층짜리 건물의 크기는 가로, 세로 47.3피트*42.3피트였고, 주방과 하인을 위한 건물은 27피트*12피트, 통역사를 위한 건물은 12피트*9피트였다. 오카모토는 8,030엔(약 8,000루블)의 비용으로 시공을 하기로 했다. 건축 자재 (돌, 목재, 문 유리, 아마, 펠트)는 최상급 재료를 쓰기로 하고, 벽돌을 제외한 자재, 도구와 일꾼은 자신이 대기로 했다. 이 비용에는 또한 건물 부지를 갖추는데 필요한 모든 필수적인 토지 공사도 포함되었다. 돌을 쌓아 만든 튼튼한 돌벽 구조물과 돌계단을 설치해야 했고, 조계지 거리에서 부영사관 건물로 이어지는 주도로는 도랑이 양편에 있고 조약돌이 깔리는 포장도로로 마감해야 했다. 그밖에 우물도 파야 했다. 부영사관 건물과 건물 및 주방 안 난로에 필요한 벽돌은 러시아 측이 대기로 했다.
이 모든 건설과 작업을 오카모토는 1901년 3월 14일(구력, 1일)까지 끝내야 했다.
마산포 부영사 대행 S.V. 소코프가 1902년 1월 3일 작성한 업무 보고서에 따르면 계약서에 명시된 모든 작업들은 실행되었다. 이 밖에도 하수도 설치, 식수용 우물 건설, 영사관 건물로 이어지는 도로포장, 외양간과 가금류 축사 건설, 텃밭 경작 등과 같은 그 밖의 부가적이고 필수적인 작업들도 실행되었다.
1900년 12월 23일 러시아 제국 국가 회의 총회는 외교부 보고서를 살펴보며 마산포에 부영사직을 임명하기로 했다.
그 후 1902년 1월 9일 외교부 지시에 따라 마산포 주재 러시아 부영사로 봄베이 총영사관 서기관인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코자코프가 임명되었다.
러시아 영사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항구 개항 이후 첫 몇 년간 마산포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달했다. 무역 규모가 매년 증가하여, 1899년에는 연 9만 1천 엔, 1900년에는 연 23만 6천 엔, 1901년에는 34만 9천 엔에 달했다.
1901년 이 항구로 총 20,223톤수 기선 169척, 총 1,033톤수 범선 스쿠너 8척과 정크선 64척이 들어왔다.
1901년에는 3-4일에 한 번 부산을 오가는 일본 상인 야토지 소유의 67톤 급 소규모 기선에다가 일본 선박회사 소유의 556톤 급 기선이 마산포를 찾기 시작했다. <오사카-쇼센-카이샤>의 기선은 일본 항구 및 제물포에서 마산을 오갔다. 그렇지만 이 기선은 군산항구의 화물을 주로 실었고, 마산포의 화물은 싣지 않았다. 따라서 부산의 대상인이자 마산포 지역 주변의 수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 지주 하사마의 회사만 얼마 간의 쌀을 직접 일본으로 운송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물건들은 부산을 경유해 수령하거나 발송했다.
대부분의 무역은 일본인들이 담당했다. 이들은 일본산 및 외국산 제품을 사고팔았다. 중국인들이 그다음을 이었다. 그들은 영국산 면직물, 중국산 실크, 식물 섬유로 짠 중국산 천을 팔았다. 중국산 천은 일본과 영국에서 생산된 얇은 천에 비해 아주 잘 팔렸다. 한국인들은 이 천으로 여름 의복을 해 입길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천이 가벼울 뿐만 아니라 매우 튼튼했기 때문이다.
중국산 천을 제외하고 일본 제품이 아닌 것 중에서 마산포로 수입된 것은 1901년 기준 약 3만 2천 엔에 해당하는 영국과 미국 면직물, 미국산 밀가루와 석유였다. 미국산 석유는 부산에 미 국 스탠더드 오일 회사(Standart Oil Co.)가 대리점을 세우고 창고를 지으면서 한국 남부에 있던 러시아 및 일본 석유 시장을 독점했다.
마산포 무역에 있어 러시아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1901년 한국 세관 통계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태평양 항구로부터 수입한 물품의 가격은 673엔이며, 러시아로의 수출은 아예 부재 하다. 마산항에 정착한 선박 중 러시아 선박은 한 척도 없었다.
1901년 마산포와 부산을 연결하는 한국 전신선이 개통되었고, 마산과 경상남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진주를 잇는 전신선도 거의 완성되었다. 같은 해 새로운 세관 건물이 건축되었고 일본 우체국 건물이 착공을 시작해서 1902년 8월 4일(구력, 7월 22일) 개관식이 열렸다. G.A. 코자코프가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은 정면에 여섯 개의 큰 창문을 가진 1층짜리 목조 건물로 내부는 매우 좁고 깊숙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당시 마산포에서 가장 좋은 건물 중 하나였으며, 이 건물과 비견할 만한 것은 러시아 영사관 건물과 코즐로프 호텔 정도였다고 한다. 도시에는 러시아 기업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베흐틴과 코즐로바의 러시아 호텔과 와인-식료품점, 도브좐스키 벽돌공장, 식료품점 등이다.
1901년 말, 외국인 거류지 주민의 수는 한국인 지역에 사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포함해 317명에 다다랐다. 그중 일본인이 261명, 중국인이 28명, 러시아인이 24명, 독일인이(세관 직원과 가족) 3명, 프랑스인이(선교사) 1명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