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월영지를 작성하며, 학보사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을 돌아봤다. 첫 대학 생활 가운데는 ‘학보사’가 함께했다. 학생기자실 문 앞에서 면접을 기다리던 3년 전, 그때가 바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나는 남다른 스무 살을 보냈다. 보통의 친구들과 달리 특성화 고등학교에 진학해 19살에 회계직으로 취업을 했다.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하던 나의 모습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닌 부모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원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며 직장 생활도 병행하니 심리적으로도 꽤 힘든 시간이었다. 이러한 현실을 잊기 위해 주말이면 친구와 음주를 하며 나를 망쳐갔다.
커다란 늪 같은 겨울을 봄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1년 넘게 일했던 회사를 떠나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물론 주변의 만류도 컸지만, 나에게 중요치 않았다. 개강 후 학교에 적응 해가던 중 ‘경남대학보사 학생기자를 모집합니다’라는 대자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자신감이 떨어졌던 나에게 ‘학생기자’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있었다. 그길로 바로 학보사를 찾았고, 선배기자들의 따뜻한 인사가 나를 맞이해 줬다. 그렇게 면접에서 합격 후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멋진 기자 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많은 양의 수습 과제와 일주일 10시간 출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선배기자들이 커피도 사주고 말동무가 되어주며 견딜 수 있게 해줬다. 그렇게 수습기자 시절을 지나 정기자가 되었다. 혼자 기사도 쓰고 촬영도 다닐 수 있는 진짜 기자가 된 거 같아 기뻤다. 가끔 국장님의 수정본을 받으며 속상할 때도 있었지만, 점차 성장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부장 기자를 거쳐 편집국장이 되었다. 학과 생활과 더불어 여러 대외활동을 병행하는 상태에서 매 기사마다 피드백을 해야 했기에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아졌다. 특히나 학내 행사가 있는 달이면 신경 쓸 부분들이 많아져 더욱 예민해졌다. 혼자 이 모든 것을 견디다 보니 번아웃이 찾아왔다. 그때 수습기자 시절 함께 했던 선배 기자를 만나 조언을 얻었다. 이후 다시금 학보사에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기자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꿋꿋하게 잘 따라와 주며 1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 이번 월영지를 통해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나의 20살은 정말 시리고, 견디기 힘든 겨울이었다. 그러나 대학을 오고 학보사를 하며 ‘나도 무언가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속에는 선배 기자들의 응원과 함께해준 학생기자들의 노고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학보사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다양한 경험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경남대학보사'에게 가장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마지막 월영지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