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발밤발밤] 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 가방부터 버려라
[정일근의 발밤발밤] 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 가방부터 버려라
  • 언론출판원
  • 승인 2021.05.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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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꿈꾸는 시간이 오면, 아주 오래전부터 제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해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생각해왔다.’

  이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며 작가인 ‘장 그르니에’의 『섬』이란 에세이집입니다. 인용한 글은 그의 ‘케르겔렌 군도’의 첫 구절입니다. 저는 이십 대에 밑줄을 쳐놓고 지금까지 그런 여행을 동경해왔습니다만, 저는 간직할 비밀도 없이 요란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마 여행 가방을 넘쳐나듯 꾸린 것 역시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나 불편에 대한 공포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떠날 때 여행 가방이 크고 무거운 사람일수록 여행의 자유보다 공포가 더 큰 나그네일 것입니다.

  가볍게 떠나기 위해 많은 것을 솎아 내야 하는 것이 여행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인생이기도 합니다. 과일 농사를 짓는 분들은 보십시오. 나무에 열리는 열매를 다 챙기지 않는 것이 과수 농사법입니다. 크고 달고 싱싱한 과일은 열매솎기를 해야 성공합니다.

  버릴 줄 알아야 더 큰 것을 얻는 것이 자연이나 사람에게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지금, 당신의 가방이나 서랍을 열어보십시오. 솎아 낼 것이 얼마나 있는지 당신의 눈으로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우리, 참 많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잡동사니 꼴입니다. 버리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난 5월 초 황금연휴에 여전히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를 타는 모습을 보면서 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주발 비행기에 여행 가방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쌓여서 떠나는 것에 연민을 느꼈습니다.

  저는 언젠가 빈 가방을 들고 푸른 바다를 건너 저의 군도로 떠날 것입니다. 빈 공책을 들고 가 쟝 그르니에의 글들을 필사할 것입니다. 가벼워지기 위해 떠나는 여행인 만큼 녹슨 정신을 벼리고 올 것입니다. 머릿속에 기억하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고, 너무나 많은 것을 짐처럼 지고 살아가는 저를 반성하고 올 것입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사는 즐거움과 자유가 행복입니다. 혹시 그땐 저에게 연락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휴대전화는 꺼놓고 있을 것입니다. 인연에 묶인 질긴 줄을 끊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쪽배 같은 여유를 그 섬에서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흥얼거리며, 낡은 여행 가방마저 버리고 돌아올 것입니다. 여행의 시작과 끝, 빈손이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석좌교수·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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