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지역 인물(11)-민족을 위한 일생,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1893~1978)
이달의 지역 인물(11)-민족을 위한 일생, 한글학자 이극로(李克魯, 1893~1978)
  • 언론출판원
  • 승인 2019.10.1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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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극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광복 후까지 한글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한글학자다. 그의 고향은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다. 어린 시절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며 마을 서당인 두남재에서 한문을 익혔고, 18세에 마산으로 와 창신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1912년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에서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1916년부터 1920년까지는 상해에 있는 동제대학을 다니면서 상해 유학생 총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을 돕는 활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주시경의 계승자로 꼽히는 김두봉과 교류하면서 한글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22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언어학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한 이극로는 우리말글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어학회를 다시 일으키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주도했다. 또 동료학자들과 더불어 민족어 3대 규범집인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 광복이 되어 풀려났다. 광복 후에도 이극로는 한글전용운동을 펼치며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을 확립하고자 다각도로 노력하였고, 『조선말 큰 사전』 1권의 발간을 주도했다.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북한에 잔류했다. 이후 북한에서도 우리말글 연구에 헌신하였다. 남긴 책으로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 『고투 40년』 등이 있다.

  조선어학회의 우리말글 연구와 수난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임경재, 장지영, 이승규, 최현배, 이병기 등이 1921년 결성한 조선어연구회에서 비롯된 우리말글 연구모임이다. 조선어연구회는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여는 등 한글연구와 보급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4일)에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이날을 가갸날로 삼았다. 1927년 2월에는 <한글> 창간호를 냈고, 가갸날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이후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과 함께 10월 9일을 한글날로 삼았다.
  1929년에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극로가 회원으로 합류했고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31년 조선어연구회를 확대개편하면서 조선어학회가 만들어졌다. 이극로를 간사장으로 선임하고 25명의 창립회원으로 출발한 조선어학회는 우리말글의 연구와 통일을 목표로 삼았다. 일제의 우리말글 말살정책에 저항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는 등 사전편찬을 위한 기초작업을 진행해 온 조선어학회는 1942년 마침내 원고 조판에 착수했다. 일제가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해 조선어학회를 탄압 해체한 것이 바로 이때다.
일제는 원고를 압수하고 사건을 날조하여 사전편찬위원과 재정보조자 33인을 체포하고 모진 고문을 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이극로는 6년, 최현배는 4년, 이희승은 2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광복 직후 다행히 일제에 빼앗긴 2만 6,500장의 초고가 경성역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다시 정리하여 1947년에서 1957년까지 모두 6권으로 된 『조선말 큰 사전』(3권부터는 『한글학회 지은 큰 사전』)을 발간했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부터 한글학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이극로는 우리말글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다. 언어와 민족은 일체여서 고유한 언어를 잃어버리면 민족은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제강점이 시작된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들어가 자산 안확에게 역사와 우리말을 배우며 민족의식의 싹을 틔우고, 중국과 유럽에서의 유학과정에서 민족어의 힘을 인식했던 그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저항하며 우리말글을 지키고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일제에 대한 그의 투쟁은 국어독립투쟁이었다. 1924년 독일 유학 당시 저술한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침략정책』에서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동화정책을 서방사회에 폭로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조선어말살로 이어질 것을 예견하고, 우리말글을 지키는 일을 일생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는 국어독립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귀국하는 길에 미국을 방문하여 동포들에게 모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국어의 사용을 통해 민족성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말글의 지속적 유지와 발전 방법으로서 사전편찬과, 한글전용, 가로쓰기를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귀국 후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천되었으며, 우리말글의 보존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민족이 있을진댄 말이 있을 것이요, 말이 있을진대 반드시 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정신과 생명이 있을진댄 그 민족은 영원불멸의 것이니, 또한 행복은 필연적일 것입니다.” - 이극로, 「한글 반포 500주년 기념일을 맞으며」, <학생신문>제13호,1946.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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