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간식 중에 ‘진해콩’이 있었다. 콩에 설탕을 바른 것인데, 어른 이로 깨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콩 과자였다. 한 알을 종일 빨았다. 외할머니는 진해콩을 일본 이름인 ‘진카이마메’로 불렀다. ‘진카이마메는 현해탄을 다 건너도록 녹지 않는다’고 했다. 우스개 말씀이었지만 진해콩이 그만큼 단단했다는 이야기다.
최근 진해에서 일어교육과 출신 동문인 이애옥 씨를 만나 역서 『한일역사여행 진해의 벚꽃』을 선물 받았다. 지은이는 고베 출신의 다케쿠니 도모야스 씨(1949~ )였다. 저자는 진해가 고향인 필자보다 진해를 폭넓고 깊이 알았다. 진해를 직접 방문해 발로 조사했고, 한일 양국의 자료를 찾아 ‘벚꽃 도시 진해’가 놓치고 있는 많은 것들을 제 자리로 복원해 놓았다.
이 책은 지은이가 1999년에 일본어로 발간했다. 이애옥 동문이 발간 20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해 지난 3월 발간했다. 책을 받고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단숨에 이 책을 다 읽었다. 그 내용 속에 진해콩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진해콩은 ‘1915년경에 초대 아이카와 다지로가 고안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일본어로 발간된 ‘진해요람’(1926년)에서 찾았다고 했다. 그 요람에 진해콩은 ‘조선 전역에 판매되고, 나머지는 각 함대의 군용납품과 멀리 모국 일본의 각 지역을 향해 수출 중이다.’고 소개돼 있다. 진해라는 이름이 진해콩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조선과 일본까지 유명해진 셈이다.
아이카와 다지로는 ‘도쿄에서 큰 규모로 과자 제조와 판매를 하다가, 그 후 진해군항의 발전을 기대하여 조선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는 성공했다. 가업은 아들인 아이카와 슈지로에게 이어져 성업 중이었다.
허나 진해콩에는 단단한 달콤함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1930년 3월 10일 일본 육군기념일에 진해에 화재로 인한 대참사가 있었다. 3월 11일자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1면에 ‘육군기념일에 대참사, 보호자 3명과 소학생 101명이 불에 타 숨지다’는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
일본이 육군기념일을 맞아 일본인과 어린이들을 입장시킨 채 영화 상영을 하다 불이나 모두 타죽었다. 진해의 일본인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진해콩 슈지로 사장은 8, 6, 4살의 3남매를 잃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 집 아이들을 봐주던 진해 경화동에 살던 당시 열두세 살의 어린 조선 소녀 박귀순(朴貴順)도 희생을 당했다.
박귀순은 그 집에서 ‘스니짱’으로 불렸다. 저자는 ‘순아’ 부르던 이름을 스니짱으로 이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귀순의 아버지는 가게에서 진해콩을 볶는 일을 했다고 한다. 어린 자식을 화마로 보낸 그들 부모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은이는 그 참사 뒤 진해콩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요즘도 진해에 진해콩이 나온다. 경화동 어디서 만든다고 했다. 단단하기는커녕 쉽게 부서지는 안줏거리다. 언론출판원장을 지낸 필자는, 이런 책이 우리 대학 출판부에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학 출판부의 문이 동문들의 좋은 책에게도 열렸으면 한다.
시인,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