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주부산 러시아 부영사관(副領事官)의 역사
[특별 기고] 주부산 러시아 부영사관(副領事官)의 역사
  • 언론출판원
  • 승인 2023.11.0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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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23년)

  올해 9월 주부산 러시아 총영사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했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러시아 영사관의 역사를 살펴보기로 했다.

  1899년부터 러시아 부영사관이 마산에서 업무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옛 러시아 부영사관의 부지에는 월포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마산시는 이를 기념하여 기념비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1903년 부영사관이 마산에서 부산으로 이관되었고, 그로부터 1923년까지 20년간 부산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외교부 고문서 보관소에 이에 관한 자료가 보존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 자료들을 분석하여 본 기고문을 작성했다. 본 기고문에는 부영사관 개설의 역사, 업무 활동, 그리고 당시 러시아 극동 지역과 한반도 남부 지역 간의 관계 발전에 대한 여러 사실이 담겨져 있다.

  1903년 6월 7일, 황제 니콜라이 II세가 영사관을 마산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것을 승인하였다.

  1903년 가을, 마산 주재 러시아 부영사였던 G.A.코자코프는 미국인 일빈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였다. 그런데 이 거래의 등록과 관련해 얼마간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이유는 부산의 감리였던 오구영이 일빈의 토지 매매에 대한 합법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자코프는 토지에 대한 일빈의 소유권, 특히 부지의 남쪽 절반에 대한 그의 소유권이 법적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빈은 그가 조선인으로부터 네 개의 무덤이 있던 그 땅을 샀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그곳이 자신의 사유지임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일빈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증서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소유임을 확인하는 어떠한 부동산권리증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코자코프에게 선금 증서 정도만 전달했다. 그러나 코자코프의 의견에 따르면 그 당시 이것은 부산에 러시아 부영사관을 건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부지였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인들이 맹렬하게 땅을 죄다 사들이는” 상황에서 그는 일빈이 이 부지를 다른 사람에게 판매할 것을 걱정했다. 

  그와 함께 부산의 감리는 이 땅이 개인이 아니라, 러시아 정부에 필요한 것임을 주장하는 코자코프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와 같은 복잡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협력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감리는 타협안을 제안했다. 국영 토지로서의 이 부지를 외국의 영리기업에 책정된 금액으로 판매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측량이 끝나자마자 코자코프는 토지 도면과 함께 토지 소유에 대한 권리증권을 넘겨 받았다. 감리가 요구했던 금액의 절반은 일빈이 지불했다. 이는 코자코프가 만약 러시아 측이 이 일과 관련해 주한성 북미합중국 대표부에게 알릴 경우 “꽤 큰 폭로 스캔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1926년 러시아 부영사관 건축부지의 전경
1926년 러시아 부영사관 건축부지의 전경

매입한 부지는 전체 면적이 28.197 평방미터에 달했고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일본 기업에서 철도역으로 가는 포장도로와 오솔길로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편리한 통행로 건설과 땅 고르기 작업 수행이 제안되었다. 부산항 매축 사업을 주도했던 일본 기업 <오쿠라>의 대표는 코자코프에게 영사관 부지가 있는 산을 그 아래 위치해 있는 세관 건물까지 깎고, 새 포장도로까지 10피트(약 3미터) 너비의 길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부영사관의 필요에 따라 사무실, 부영사 집무실, 응접실, 식당, 침실 및 화장실 세 칸, 간이식당과 창고로 구성된 기와 또는 석판 지붕을 얹은 1층짜리 벽돌 건물과 통역인을 위한 작은 조선식 건물을 짓기로 계획되었다. 

  판매전인 1932년에 작성한 묘사에 따르면 부지는 항구 위로 우뚝 솟은 산의 가파른 경사면에 자리했다. 거기에서는 만과 대양의 풍경이 펼쳐졌고,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경성-부산 철도역과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매일 오가는 연락선이 정박하는 부두가 위치해 있었다. 토지 대장에 따르면 부지는 숲이 우거진 곳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상 그곳은 초목이 전혀 없는 땅이었다. 영사관 건축이 예정되어 있던 도로와 인접한 부지의 아랫부분은 산의 일부를 깎고 돌로 옹벽을 세웠다. 가장 넓은 부지에는 청소부를 위해 마련된 아연도금 지붕의 단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부지 관리자인 일본인 미야자와 씨가 지은 비슷한 모양과 규모의 건물이 한 채 더 있었다. 부지에 그 밖의 다른 건물은 없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볼 때 부지는 영사관 건축을 위해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목 공사는 일본 기업인 <오쿠라>에 의해 수행되었다. 또한 부지의 둘레에는 돌로 된 옹벽이 세워졌다. 그러나 영사관 건물 자체는 결국 건축되지 못했다.

  다만 러시아제국 부영사관은 “사코모 오쿠사타로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임차한 건물에 자리했다”는 자료가 남아있을 뿐이다(주소는 파악되지 않는다).

  1923년 주부산 러시아 부영사관은 문을 닫았다. 1923년 12월 6일 도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영사 V.A.스크로두모프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알려드립니다. 도쿄 주재 러시아 대사관의 명령에 따라 이 항구에 있는 부영사관은 임시 폐관합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부영사관 소관 사항이었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있는 경성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으로 모든 공식 문서들을 송달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황실 부영사관 폐쇄 이후 러시아 측 부지의 관리 업무는 미야자와 신사쿠라고 하는 부산해양경찰서의 경찰관에게 일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담은 공식 문서가 발급되지는 않았다. 1925년 3월에 모든 외국 영사관의 재산이 총독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자 미야자와는 부산이사청으로부터 부지 관리를 계속해 달라는 공식 제안을 받았다.

  1935년 부산에 있던 모든 러시아 소유의 토지는 팔리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부산 러시아 부영사관 직원들의 사진을 찾지 못했다. 현재 남아있는 서류들을 통해서는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한국에서의 업무에 대한 시간적 순서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1903년부터 마산 주재 부영사 코자코프가 부산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코자코프가 서명한 서류는 이미 1904년에 ‘부산 주재 러시아 부영사관’의 서식으로 작성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06년 11월에는 F.I.바실리예프가 부산 주재 영사 작위 승인서를 받았다.

  1915년에는 그를 대신해 부영사 V.A.스코로두모프가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한편 표도르 이바노비치 바실리예프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이 보존되어 있다. 1917년에 작성된 공직 명부에 따르면 그는 1862년 9월 19일생이며, 국무위원 직급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성 안나 2급 훈장과 성 스타니슬라프 2급 훈장 소지자였으며, 또한 여러 외국 국가들로부터 높은 상을 받았다. 그는 결혼하여 1896년 10월 28일에 아들 미하일을 낳았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전문 동양학자였으며, 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동양어학부 중국-만주-몽골 전공의 모든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외교부 아시아국 관리였으며, 해외에서는 도쿄 주재 러시아 공관에서 근무했고, 고베의 부영사로도 일했다. 1906년 1월 주부산 영사로 임명되었고, 1906년 10월에 근무를 시작했다. 한편 1915년 4월에는 다롄의 영사로 자리를 옮겼다.

  스코로두모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는 1915년 5월에 부산 주재 부영사로 임명됐고 1915년 11월에는 근속 연한을 인정받아 7등 문관 단장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그는 1907년 성 스타니슬라프 3급 훈장을 수여받았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은 당시 러시아 영사들의 업무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러시아 국민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한국의 남부 지역과의 무역 협력을 발전시키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그들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이미 당시에 러시아 극동(첫 번째로는 블라디보스토크)과 한국의 남부 지역과의 관계가 활발히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16년 7월 26일 부산에는 <동아시아무역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이 모임은 러시아 및 중국과의 무역 환경을 연구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모임에는 부산의 유력한 사업가들이 참가하였고, 연구회는 3개의 분과로 조직되었다. 첫 번째 분과는 ≪무역 관계의 금전적 측면 연구≫의 문제를, 두 번째 분과는 ≪화물 배송과 교통수단 연구≫의 문제를, 세 번째 분과는 ≪무역 관계의 기술적 측면 분석≫을 담당했다. 사무 관련 업무는 부산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수행했다. 이 조직의 첫 번째 활동은 러시아와의 무역 환경을 현지에서 연구하기 위해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의 답사를 계획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바로 이런 목적으로 1916년 8월 24일 연구회의 회원 5명이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로 떠났다. 이 회원들은 ≪쌀, 과일, 소금, 고무 그리고 통조림 산업≫ 종사자들이었다.

  1915년 부산은 해운 회사인 니폰-유센-카이샤(Nippon Yusen)와 오사카-시오센-카이샤의 정기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이 두 회사의 증기선들은 종종 과적을 하였고, 그로 인해 거기에는 한국 상품을 실을 여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부산 상인들은 주로 한국 해역에서 항해하고 일본 항구는 한 곳 이상을 기항하지 않는 다른 증기선을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와의 연결을 조직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1915년 6월 19일부터 블라디보스토크와 부산을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세 번째 연락선이 새롭게 마련되었다. 조선-유센-카이샤 해운 회사가 제공한 이 연락선은 나가사키, 부산, 원산, 성진(김책), 청진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갔다. 이 노선을 따라 두 척의 증기선이 운항했고, 평균 한 달에 4번, 증기선당 2번을 운항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의 기간 동안 부산항을 통한 수출 규모로 볼 때 아시아 지역의 러시아가 일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수출된 물품들에는 쌀, 소금, 생선, 건어물, 담배와 다양한 약재들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으로 수입된 주요한 품목들에는 연어 및 다른 생선, 미역과 비료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수입된 러시아 품목 중에 한국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제품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러시아산 소금에 절여지거나 신선한 형태로 수입된 청어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 부영사 스코로두모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며칠간 이어지는 가을의 ‘추석’과 같은 명절, 설날, 온갖 축일과 행사, 결혼식 또는 장례식에 모든 한국인들은 꼭 청어를 식탁에 올렸다. 심지어 한국에서 인기 있던 값싼 토종 생선인 ‘명태’도 청어만큼 수요가 많지 않았다. 청어는 한국인들의 입맛에 꼭 맞았다”.

  양국의 무역 전망에 대해 논의하면서, 한국 상인들은 성냥용 사시나무, 유제품, 버터, 창문 유리 등의 러시아 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싶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또한 한국인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다양한 해산물, 생선, 조가비, 여러 종의 꽃게, 비료 및 약재료를 위한 미역 및 해조류, 생선과 꽃게 통조림, 과일, 소금, 콩, 돗자리, 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제품, 바구니, 종이와 담배” 등의 물품 수출도 제안했다. 부산에서 업무를 했던 러시아 영사들은 특히 한국 종이(한지)의 품질을 높게 평가했는데, 강도가 있고 섬유가 많으며 추위를 잘 막을 수 있어서 러시아에서 수요가 높을 것이라 하였다.

  물론, 부산 주재 러시아 영사관의 역사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현존하는 자료에 흥미로운 사실이 많이 담겨져 있지만 찾고자 하는 대답에 대한 질문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어쩌면 이 주제에 대한 어떤 자료들이 한국의 고문서 보관소에 소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옥사나 두드니크(주부산 러시아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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