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이다. 시월은 수확의 계절이다. 봄부터 준비한 모든 일들이 결실을 보기 위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50대 후반, 적지 않은 나이에 이르러서야 필자도 생의 방점을 찍기 위해 출근길 운동화 끈을 조인다. 욕심은 진작에 내려놓았다. 나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요즘은 창원의 한 기획 도서 전문 출판사에서 일한다. 고전을 번역하는 출판사였는데 입사해서 현대문학 분야 임프린트 출판사를 새로 만들고 <사유악부>라 이름 지었다. 출판사 일을 하면서 새삼 기획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편집하는 에디터가 저자를 발굴하고 저자의 원고를 어떻게 기획하는가에 따라, 책의 판매는 물론이고 저자의 원고도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몇 년 전 서울, 경주, 진주, 하동, 마산, 고성 등지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젊은 시인들이 찾아왔었다. 중앙지 신춘문예 출신도 있었고 명망 있는 문예지 신인상 출신도 있었다. 찾아 온 연유를 물어보니, 등단도 하고 첫 시집을 낸 시인도 있었지만, 지방에서 시를 쓰는 어려움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분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많은 얘기들을 우선 들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필자는 젊은 시인들에게 <시골시인 K>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각각 산문 한 편 시 열 편씩을 쓰고 모아 합동시집을 내자고 말했다. 더 이상 중앙문단만을 바라보지 말고 여러분들이 중앙이 되라는 선배로서의 주문이었다.
사실 지역의 시인들이 모여 자비로 동인지를 내면 서점에선 열부도 팔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동인지가 아닌 <시골시인 K>라는 네이밍을 하고 브랜드화해 보자, 는 기획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경상도 시인을 중심으로 한 <시골시인 K>는 발간 후 중앙일간지를 비롯해 지역 신문의 언론보도와 여러 문예지에 서평이 실린 데 이어 초판 매진, 그리고 그해 세종도서에 선정되는 기쁨까지 생겼다. 그다음 해는 제주의 젊은 시인 합동시집 <시골시인 J>로 이어져 합동시집이 발간되었고 그다음 해에는 순천, 진주 등지의 젊은 시인 합동시집 <시골시인 Q>로 이어졌다. 이 세 권의 시집에 참여한 시인 중 많은 이들이 권위 있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고 메이저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발간을 앞둔 사실은 더더욱 기쁜 일이 되었다.
기획의 중요성은 이런 것이다. 지역의 젊은이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 없어 할 때마다, 필자는 자신을 믿고 자신을 설계하고 기획해 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새로 일하는 출판사에서도 시인, 소설가 등 지역의 묻혀있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의 원고를 기획하는 일들이 나날이 즐겁다.
성윤석(시인, 도서출판 사유악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