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늘 일상을 같이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늘 내 편이라고 생각하여 깊이 고마워하거나 진심으로 내 마음을 내비쳐 보이지 못한 것 같다. 철이 없어서 내 삶이 제일 힘들다고만 생각하고는 그녀의 상심이나 아픔은 뒤돌아봐 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나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격려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때는 고등학교 3학년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수능 50일도 안 남았던 시절에 나는 공부에 매달려 정신이 없었다. 지치고 힘들어 어느 누구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오직 이 시기를 잘 버텨야 한다는 무거운 짐만 가득 짊어진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을 지내온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를 가고 수업을 듣고 야간자율학습을 하였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은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씻자마자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들기 일쑤였다. 집에 있는 시간은 잠자는 시간뿐이다 보니 그녀와의 대화는 “나 왔어”, “나 이제 잔다.”라는 이 두 마디가 끝이었다. 곧 수능이니까 그녀에게 소홀해져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것이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 학교에 가기 위해 책상 정리를 하였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져 있는 흰 종이를 발견하고 열어보았다.
그 종이는 평범한 흰 종이가 아니라 그녀가 나에 대한 사랑을 듬뿍 담은 편지였다. 편지에는 ‘인주야 고3 보낸다고 고생이 많네. 남은 기간 동안 더 힘내고 인주가 바라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빌게. 사랑해♡’라고 적혀 있었다. 까탈스럽던 사춘기를 지나고 나서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처음이라는 생각에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 그녀가 읽었냐고 물어보았다. 그 편지로 내 마음이 차분해지고 부드러워져 있었지만 차마 부끄러워서 “응 봤어”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학교에 갔다. 평소 가정에서 애교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사랑해” “자꾸 생각해도 너무 사랑해”라는 애정이 듬뿍 든 그녀의 고백과 격려는 어릴 때 이후 듣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어색하였다. 그녀의 편지는 학교 가는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전까지 계속 읽어 외울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그 편지가 내 안에 리듬이 되어 나를 즐겁게 만져주었다.
이 편지에 많은 글이 써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 그걸 헤아려주는 내 편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늘 내 옆에서 진정으로 응원해주는 사람은 그녀인 것을 잊고 살았던 것뿐이다. 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해주고 사랑의 거울이 되어준 그녀가 그날 이후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그녀는 성적으로 나를 혼낸 적이 없다. 청소년기에 가지면 좋을 미래의 비전이나 꿈에 대해서도 강요하거나 어떤 길을 가라고 종용하지 않았다. 나를 항상 믿어주었다. 어깨가 쳐질 때마다, 나의 현실이 버겁다는 학업의 부담감이 얼굴에 묻어날 때는 그녀의 손은 내 등을 쓰다듬어 주었고 한결같이 따뜻했다. 그녀의 관심과 염려가 보이지 않는 나의 등 뒤에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깊은 모성에 익숙해져서 그동안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몰랐던 것에 죄송하였다.
이후, 그녀에게 대하는 태도를 조금 부드럽게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공부도 중요하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을 위해 그녀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하였다. 요즈음은 웃음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나의 모습이 어딘가 인간으로 좀 더 자란 뿌듯함을 안겨준다. 이 편지는 나에게 그동안 무심코 지나쳐온 그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 <내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일 어색하고 쑥스러워도 용기를 내어 그녀를 안아 드리고 싶다.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예정이다. 그녀의 편지가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인 것처럼 그녀에 대한 내 사랑 고백의 때가 그녀에게 그녀만의 생애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오랜 시간 붙들고 갈 수 있는 행복한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 나도 엄마를 정말 사랑합니다.”
정인주(간호학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