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그 참혹했던 순간,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이다
6·25 전쟁 그 참혹했던 순간,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이다
  • 박수희 기자
  • 승인 2019.06.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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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평화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며 피를 토했다. 광복을 맞이한 지 겨우 5년이 다 되어 가던 해였다. 하나 되어 만세와 독립을 울부짖고 외치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펜을 쥐어야 할 나이에 총을 잡고, 피난 가던 길에 사람에 치여 놓쳐버린 손들은 여전히 잡을 수 없다. 약 3년이 지나고 휴전 협정이 맺어졌지만 이미 우리나라는 깊고도 날카로운 선으로 나뉘었다. 2019년 현재까지도.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 중 가슴 아팠고 여전히 아플 사건인 6·25 전쟁, 그 역사를 알아본다. / 사회부

 

  평화로운 하루가 또 지나간다. 우리에겐 당연한 이 하루는 아무 대가 없이 얻어진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 위에서 가까스로 평화는 피어날 수 있었다. 사실 조용한 이 하루가 평화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69년째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단지 휴전 협정이 오래되고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아지자 우리가 휴전 중이란 사실을 잊고 지낼 뿐이다. 우리는 아직 휴전 속에 산다는 사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단 사실을 떠올리며 그 시절 그 비참했던 전쟁을 떠올려보자.

 

찾아온 독립, 외세의 참견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광복을 맞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카이로회담에서 우리나라는 독립을 약속받았지만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엔 미군이 북쪽엔 소련군이 점령해 국토를 분단시켰다. 반반 나눠진 상태로 미국·영국·소련 3국 외상은 모스크바 회동에서 한반도를 5년간 신탁 통치하자며 합의했다. 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주독립, 통일을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소련과 미국 정치 입장이 다른 상황에서 남북을 온전하게 잇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해져 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우리나라 상황을 UN에 보고했다. UN은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이 목적인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에 한반도 전역에서 시행하기로 했다. 이후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결성해 선거 감시를 맡겼으나 소련이 이를 거부해 북한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남북이 통일된 형태가 아니라 남쪽만 5월 10일에 총선거가 이루어졌고 그해 7월 17일에 헌법을 선포했다. 광복한 지 3년 만에 남쪽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북한은 같은 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 등 공산 제국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UN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고 남한만 유일 합법 정부로서 혈통을 인정해 주었다.

 

끝내 터져버린 민족 간 전쟁

  1949년 남한에서 드디어 미군이 철수했다. 사람들은 그저 미군이 떠나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폭풍전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 잠잠함에 안심할 때쯤,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애치슨라인을 발표했다. 미국은 알류샨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한 선을 방위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 선에서 벗어나 있었고 미국은 우리나라 안보에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23일까지도 한반도는 잠잠했다. 이에 안심한 남한은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고 병력 3분의 1 이상을 외출시켰다. 이때를 잠자코 기다리던 북한은 결국 6월 25일에 탱크를 앞세워 38선 근처 남한 진지를 기습했다. 6·25 전쟁의 서막이었다. 북한의 기습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북한은 서울을 넘어 대전, 대구 언저리까지 남침했다.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해 즉각 전투를 멈추라는 요청을 담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무시했고 결국 미국 대통령은 한국군 지원을 명령했다.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고 평양, 원산을 넘어 압록강, 두만강까지 반격했다. 승리의 기운이 보이는 듯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유엔군은 서울 밑으로 철수했다.

  1951년 2월, 유엔 총회는 중공군에게 철수를 요구했고 계속되는 싸움에 지친 나머지 그해 7월에 개성에서 휴전회담을 진행하게 되었다. 3달 뒤엔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겼고 1년 뒤 북한·중국 쪽이 비협조적이자 태도를 문제 삼아 회담이 중지되었다. 길고 긴 2년간의 회담 끝에 1953년 7월 27일, 미국과 북한·중국은 휴전 협정에 합의했다. 이후 남한은 반공, 북한은 반미 정책을 펴며 서로를 끔찍하게 증오하고 국가별 신념을 강화했다.

  남한은 이 전쟁으로 인해 약 160만여 명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국군, 인민군 할 것 없이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위치를 털어놓거나 상대 쪽에 붙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전쟁이 잊혀질 즈음, 남북한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고 남북 회담을 열기도 했으며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개성 공단 오픈 등 통일을 위한 노력을 보였다. 금강산, 개성 공단 폐쇄, 미사일 도발 등으로 잠시 불안이 고조되었기도 했지만, 작년 남북정상회담, 올해 북미정상회담으로 평화 통일에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되었지만 점차 그 격차를 좁힐 것이라 예상된다.

  통일에 대해서는 아마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통일을 꺼리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전쟁을 바라지는 않는다. 눈에 보이는 평화에 젖어 우리가 휴전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이 덧없는 전쟁을 끝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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