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혐오의 시대가 열렸다. 인종, 국적, 성별, 나이, 성적 지향, 신체적 특성 등 바꾸거나 가꿀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을 향한 무차별 혐오가 쏟아지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혐오는 쉽고 사랑은 어렵다고 말했다. 우리는 왜 굳이 어려운 사랑을 택해서 살아야 할까? 그냥 쉽게 혐오하고 살면 안 되나? 이 질문에 대답은 당연히 ‘안된다’다.
인간이라면 본디 ‘혐오’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혐오는 거부반응에 가까운데, 예를 들어 우리가 바퀴벌레를 보면 싫어하는 것과 같다. 심지어 바퀴 벌레는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바퀴벌레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벌레로 보이는듯 이 혐오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이렇게 자리 잡은 혐오는 본디 감기와 같아서 빠르게 전염되고 서서히 병들게 만든다. 하지만 감기는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면 나아지지만, 혐오는 그렇지 않다. 한번 병든 혐오는 약을 먹어 낫게 할 수도 안정을 취해서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인류의 조상이 불을 발견하고 무리 지어 생활하고 도구를 사용했던 그 순간부터 꾸준히 던져지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세기를 지나면서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뇌했다. 사실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다. 시대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마음 한편에서 빛나고 있는 ‘사랑’을 알고 있다. 이성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조금 더 근본적인 사랑이 필요하다. 바로 인류애(人類愛). 인류라는 이름 아래 함께 묶인 전체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시끄럽게 울 수도 있다. 10대 청소년이 쓰는 말들이 어색해질 수도 있다. 생소한 외모의 사람이 말을 걸 수도 있다. 외관으로 보이는 나이가 무색하게 나잇값을 못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기에 모두 그럴 수 있다. 절대 그들과 섞여서 지낼 수 없을 정도의 ‘문제’도 아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다. 다양한 해결 방안이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혐오’는 해결 방안 중 하나가 절대 아니란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불쾌하고 이해할 수 없고 피해를 주는 것 같을 땐 역지사지해 보자. 나는 어떤가? 나의 행위도 누군가에게 그렇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질문 앞에서 모른 척해왔던 사랑을 이제는 마주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자. 사랑하는 게 어렵다면 사랑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보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니 우리가 속한 이 세상을 혐오하기보다는 가엾어 하며 사랑의 뜨겁고 따끔한, 때로는 눈물이 쏟아지는 진정한 참맛을 알려주자. 언젠가 모두가 사랑 앞에서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간절하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