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K-POP 그룹이 많아진다는 점은 K-POP 음악 시장이 점차 레드 오션화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각 기획사는 보다 다양한 그룹 콘셉트를 대중에게 선보이려 노력한다. 강렬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와 독특한 세계관을 내세운 에스파(aespa), ‘IM FEARLESS’라는 문장을 애너그램으로 비튼 그룹명에서 알 수 있듯 강한 자기 확신과 의지를 서사화한 르세라핌(LE SSERAFIM)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기획사가 대중들이 만족할 만한 특색을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다. 매년 그룹이 데뷔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되고 잊히는 경우가 상당수다.
영파씨(YOUNG POSSE)는 어쩌면 냉혹하다고도 할 수 있을 K-POP 시장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방식으로 주목을 이끈 그룹이다. 데뷔한 지 만으로 1년이 채 되지 않은 이들은 ‘걸그룹과 힙합 콘셉트’라는 다소 의외의 조합을 채택했다. 지난 3월 20일 발매된 2집 EP 『XXL EP』는 그러한 선택이 얼마나 흥미로운 효과를 창출하는지 알아보기에 훌륭한 예시가 되는 음반이다.
우선 첫 트랙 <Scars>에 주목 해보자. 재생과 동시에 화려한 레이지(Rage) 비트가 귀를 파고든다. 국내 힙합에서 유행 중인 레이지 비트를 앨범의 도입부에 배치했다는 점에서 영파씨가 추구하고자 하는 장르의 선명성이 드러난다. 자기 과시적인 슬랭이 섞인 가사(“손 안에 보석이 눈이 부셔”, “Drippin’, drippin' with macaroni Sauce”) 역시 전형적인 힙합 장르의 요소로 읽힌다.
타이틀곡 <XXL>에서는 외려 90년대 올드 힙합의 재현이 두드러진다. 둔탁한 붐뱁(Boom-Bap) 드럼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을 연상시키는 베이스 라인이 얹힌 비트 위에 래핑이 쏟아져 나온다. 레트로한 분위기에 걸맞는 가사(“배기팬츠 내려 입고 Triple Axel”) 또한 돋보인다. 90년대 미국 힙합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그룹 우탱 클랜과 자신들을 겹쳐 보는 대목(“maybe baby version Wu-Tang Clan”)은 특히나 인상적이다.
영파씨는 비단 K-POP 팬덤을 넘어 다양한 장르 음악팬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더불어 영국의 음악 매거진 NME는 본 앨범 수록곡의 뮤직비디오를 공유하며 호평하기도 했다. 내려입은 배기팬츠와 반다나, 동명의 유명 음악 매거진 표지를 오마주한 앨범커버, 화려한 비트, 기존 K-POP 문법과 차별화된 힙합 가사까지. 장르적 요소를 여러 콘셉트 중 하나로 차용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들과 같이 힙합의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따르려는 시도는 드물었다. 영파씨가 대중들과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주목받는 현상에는 단순히 음악적 코드의 새로움을 넘어 한 장르의 문화적인 코드에 진정성 있게 다가갔다는 점이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제 막 두 개의 EP를 발매한 신생 그룹인 만큼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