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 아고라] 어느 제자의 ‘희망’ 이야기
[한마 아고라] 어느 제자의 ‘희망’ 이야기
  • 언론출판원
  • 승인 2022.10.1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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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수 년 전의 일이다. 월영지 주변의 초목이 노랗게 변해갈 즈음, 막 제대한 그가 찾아왔다. 소소한 얘기들 끝에 감명 깊게 읽었다며 몇 구절 적어 온 것을 내밀었다. ‘희망’에 관한 루쉰의 글이었다.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는 공기업 취업에 대해 오래 고민했었고,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영어 공부이고, 현재 자신의 영어 능력은 중학교 2학년 수준쯤이라 진단했다. 꽤 긴 시간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몇 달 뒤 그가 제법 손때가 묻은 얇은 영어책을 들고 왔다. 곧 기본 반을 끝내고, 종합반으로 옮겨 갈 것이라 했다. 그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더 정갈했다. 그는 영어 학원에서 중학생들과 공부하고 있었다. 이듬해 봄에 그는 복학했고, 학교 수업과 영어 공부를 병행했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그의 책은 더 두꺼운 것으로 바뀌어갔다.

  몇 년 전 승진했다고 찾아온 자리에서 유치원생인 아이가 고등학교 진학할 때쯤 들려줄 것이라며 자신의 성공 요인을 몇 가지로 정리해 주었다.

  첫째, 동기 형성을 위한 계기의 마련이다. 그는 대학 저학년 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어 힘들었다고 했다. 일상에서 한 걸음 비켜나 있었던 군 복무의 시간이 자신에게 진지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했다.

  둘째, 자기의 수준에 맞는 책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긴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만일 그때 성급하게 ‘TOEIC’ 책을 집어 들었다면, 공부를 통한 성취의 기쁨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영어 잡지를 곁에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중학생들과 공부하면서 아이들이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인데 이런 영어 공부를 해요”라고 물어올 때, 차마 대학생이라 말하지 못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한다고 했다던 그의 표정이 선연하다.

  셋째, 학습 시간의 지속성과 집중화이다. 수업을 위한 공부와 취업을 위한 공부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학기 중에도 취업을 위한 공부를 지속했고, 방학 때는 그것에 집중했다. 3학년 겨울 방학쯤 “공부를 아무리 해도 나아지는 것을 알 수 없어 힘들다”며 그가 펑펑 울었다. 

  가끔, 흔들리는 희망과 흩어져가는 공부 시간을 붙잡기 위해 그가 스스로와 싸워가던 2년여의 세월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의 학생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이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그것을 이루어가는 여정은 그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병옥(교육학과 졸업 동문,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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