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5의거가 일어난 지 61돌이 되는 해이다. 환갑을 넘었으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무겁다. 그나마 2010년 3월 12일 자로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공포된 일은 위안을 준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말이다. 3·15의거기념사업회 관계자를 비롯하여 관심을 가지고 이 일에 매진한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3·15의거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4·19는 ‘혁명’인데 3·15는 ‘의거’라는 도식 때문이다. “3·15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세간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다. 잠시, 부정 선거가 어지럽게 춤추었던 1960년으로 시계 바늘을 돌려 보자.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의거(2·28민주운동)는 부정 선거 규탄의 신호탄이었다. 3월 8일에는 대전에서 학생 의거(3·8민주의거)가 일어났는데, 이는 2·28민주운동을 계승하는 성격이 짙었다. 그리고 3월 15일 드디어 마산에서는 터질 것이 터지고야 말았다.
마산 의거는 두 시기로 나눠진다. 부정 선거 당일의 시위가 제1차 시위였고, 4월 11일~13일에 일어났던 시위는 제2차 시위였다. 제2차 시위는 김주열 군의 참혹한 주검에서 촉발하였다. 그리고 그 바람이 북상하여 4월 18일과 19일 서울 시위로 이어져 마침내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4·19만을 가리켜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28, 3·8, 3·15, 4·19 등이 다 같이 ‘4월 혁명’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명칭 문제를 비롯하여 그 위상 재정립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사안임에 틀림없다.
해인대(海印大)는 이전 우리 대학 이름의 하나였다. 3·15의거 제2차 시위 때 해인대 학생들이 분연히 의거에 뛰어난 일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대학생 시위로는 전국 최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 완월동에 소재했던 당시 해인대는 규모가 작아 전교생이 580명 정도였다. 이 가운데 1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목숨이 오고가는 극비를 요구하는 사안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첫째, 우리는 비폭력주의로 대항한다. 둘째,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투쟁한다. 셋째, 우리는 무저항주의로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물러갈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당시의 구호가 귓전을 맴도는 듯하다.
가뜩이나 서울화(중앙화)에 밀려 지방이 힘든 시기이다. 대한민국 민주화에 주춧돌이 된 3·15 등이 어엿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지 않을까. 봄을 재촉하는 비가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있다.
김정대(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