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이별에 기인한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헤어질 때도 가장 아쉬워하는 사람은 나였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 때는 눈물까지 흘리곤 했다. 이처럼 나는 짧은 시간의 이별이든 영원한 이별이든 이별에 유난히 약했고, 특히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에서 느끼는 슬픔은 매우 컸다. 시간이 흘러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경험을 통해 이별에 조금은 익숙해진 지금도 생각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별이 있는데, 그 이별은 외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다.
외할머니와의 이별이 이토록 슬픈 이유는 내게 정말 소중한 분이신 외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사는 지역과 2시간 거리인 영덕에 살고 계셔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자주 찾아뵐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명절이나 여름휴가 같은 날에 외할머니댁을 방문할 때면 사촌들과 우리 가족을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따뜻한 정으로 대해 주셨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은 꼭 날을 잡아 사촌들과 우리 집을 번갈아 며칠씩 머무셨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시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할머니께서 가시는 날엔 “할머니, 하룻밤만 더 자고 가”라며 슬퍼했다. 너무 아쉬워하는 나를 위해 할머니께서는 하루 이틀 더 머무시다 내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 몰래 가셨던 적도 있었다. 그 짧은 이별조차 힘들었던 나에게 외할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은 엄청난 슬픔으로 다가왔다.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시기 시작했던 때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부터였다. 그때 처음 위암 판정을 받으시고 식구들 모두 크게 걱정했지만, 다행히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수술을 받으시고 금방 회복하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영덕에서 지내시면서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이는 외할머니의 모습에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외할머니께서 앞으로는 계속 건강하실 줄 알았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암이라는 병이 드라마나 영화에서 연출되는 것만큼 무서운 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결혼할 때 등 외할머니와 미래를 기약하며 함께하려 했던 수많은 일들도 모두 실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저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며 항상 따뜻한 정으로 대해 주시는 외할머니께서 언제까지나 영덕의 바다에서 반갑게 맞아주시리라 믿었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외할머니께서 동네 병원에서 받은 건강 검진 결과에 이상이 있어 큰 병원에서 재검진을 받으셨는데 위암이 재발하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나왔다. 완치 판정을 앞두고 있었던 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엄마와 이모들은 ‘혹시나’하는 희망으로 여러 병원에 들러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셨지만 이미 암이 여러 군데로 전이되어 더는 손을 써볼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항상 밝으셨던 외할머니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신 후 전처럼 우리에게 밝게 웃어주시는 것이 힘겨워 보였고,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야위어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암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앗아갈 수 있는 병인지 느꼈다. 그렇게 몇 달을 앓으시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외할머니께서는 병원의 예상보다 일찍 돌아가셨고, 결국 그 전 해 겨울 외할아버지 제사가 외할머니가 계신 영덕의 집을 방문한 마지막 날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처음에는 외할머니께서 여전히 영덕의 집에 살아계실 것이라는 착각까지 했었다.
외할머니 장례식 마지막 날, 외할머니께서 계시지 않는 영덕의 빈집을 방문하고 나서야 나는 외할머니께서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텅 빈 집 마루에서 절을 하며 지금까지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을 느끼며 오열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던 그 순간 외할머니께서 내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셨는지, 소중한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외할머니께서 하늘에서는 ‘더는 편찮으시지 않겠지’, ‘그동안 드시지 못했던 맛있는 음식들을 마음껏 드실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며 한동안 떠올리기만 해도 슬펐던 외할머니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외할머니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를 ‘외할머니께서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뵐걸’하는 후회와 함께 사무치게 보고 싶은 그리움, 그리고 슬픔에 빠지게 하곤 한다.
지승연(군사학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