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의 봄을 기억합니다. 한마상 앞에서 제임스 딘의 거침없는 모습에 열광하고, 지미 핸드릭스의 기타연주를 즐기던 제가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꿀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즐거움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세상으로 나와 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고, 습관을 바꿨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그 시절 제게는 껌이었지요. 가능성을 향해 질주하라고, 근육질의 말 동상이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이후 영문학과를 졸업해 전공과 상관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중소기업에서의 기획실 업무, 그러다 액세서리 판매, 과일 노점상, 컴퓨터 조립, 화장품 방문 판매, 도서납품까지 십여 년을 떠돌았습니다. 그 십 년을 제외하고 전공을 살려 영어 학원을 운영한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어릴 적 부족함 없이 살다가 부모님의 사업이 실패하여 ‘down and out’, 즉 빈털터리가 되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 만나 떡두꺼비 같은 아들, 딸을 얻었습니다. 행복도 잠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직업을 바꾸어 도전하다 무너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은 갖가지 양념을 다 넣어야 제 맛이겠다 싶습니다. 절망, 비루함, 좌절, 질투, 영광, 환희...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수십 가지의 감정을 다 겪어보니 그 모든 것이 행복을 만드는 쐐기돌이겠구나 싶습니다. 이제 환갑을 바라보며 가는 제게 일흔을 훌쩍 넘은 누님이 야야~ 아직 한창이구나 하십니다.
‘몸이 아파서,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가정환경이 좋지 않아서, 머리가 나빠서’를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도,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도, 머리가 나빠도’로 바꿔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 지인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보게 됩니다. 소작농의 자식이라 인생역전은 공부밖에 없다고 수년을 공부하니 변호사가 되고 교수도 되고 의사도 되고 회사의 중역도 되더군요. 또 제 후배 중 하나는 책상머리 공부는 관심이 없어 자동차 수리 기술을 배워 어느새 그 분야에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인생을 롤러코스터와 같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때로는 죽을 만큼 아프고 때로는 죽을 만큼 사랑할 때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끝없이 추락하기도, 끝없이 오르기도 합니다.
‘Climb High See Far’ 높이 올라 멀리 보라를 원훈으로 두고 수십, 수백 명의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에게 선배들의 인생 사례를 들려줍니다. 아이들에게 인생에서 성공의 의미를 물어보면 돈의 수량화로 답 하더군요. 대부분 인정합니다. 하지만 돈만을 찞는 인생이 행복할까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랍니다.
1985년의 봄. 그 이후 저는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넘어지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고. 그 삶 속에서 행복했나, 하지 않았나 하고 물으면 저는 틀림없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직 ‘한창’이고, 미래는 그 누구도 아직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예측 가능한 일들만을 찾아 편안하게 살지 않으려 합니다. 익숙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When the going gets tough, the Tough go shopping’ 미드에서 대사로 나왔던 영어 속담입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되새깁니다. 생각은 현실을 만든다고 하니 어디가 바닥인지 모를 나락에서도 “난 오뚜기다.” 해봅니다. 오래 꿈을 꾸면 어딘가에 그 에너지가 전해져 꿈을 닮아간다 하네요. 그 시절 한마상 앞에서의 저를 떠올리며 행복하게 살아갈 앞으로를 상상합니다. 불가피한 시절과 미래가 오더라도 ‘keep going’ 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자기 확신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이겠습니다.
장 훈(영어영문학과 졸업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