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사
학장 이용조(學長 李龍祚)

  천상(天上)에 벌려 있는 해와 달, 별들이며 구름 가는 것, 번갯불들이며 지상(地上)에 널려 있는 산(山)이나 물이나 풀, 나무, 날고 기는 짐승들, 오고가는 사람 할 것 없이 하나도 빠짐없이 밉고 고운 것을 초월(超越)하여 실상(實像) 그대로 광대(廣大)한 해면(海面)에 영사(映寫)되는 것과 같이 우주(宇宙)에 일어나는 가지가지 현상(現象)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원상(元相)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나타나는 현상(現象)을 이름 하여 「해인(海印)」이라고 한다. 석가세존(釋迦世尊)께서 사십구 년 간(四十九年間) 고구정녕(苦口叮寧)으로 설(說)하신 우주(宇宙)의 진실(眞實) 그것이 곧 해인(海印)이다. 해인사(海印寺)에 모셔 있는 우리 겨레의 자랑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곧 그것이다. 해인(海印)은 학문(學問)의 원(源)이며 진리(眞理)의 상징(象徵)이다.

  「해인(海印)」을 교명(校名)으로 건학(建學)한 지 십 년(十年). 남달리 형극(荊棘)의 길을 걸어오다가 이제 겨우 안정(安定)된 보금자리를 얻어 대붕(大鵬)을 상징(象徵)하는 무학산(舞鶴山)을 등에 업고 유아독존(唯我獨尊)의 표지(標識)인 천자봉(天子峯)을 안하(眼下)에 굽어보며 팔백(八百) 건아(健兒)의 용자(勇姿)는 비로소 태평양(太平洋)과 호흡(呼吸)하는 남해(南海) 바다에 인(印)지게 된 것이다. 십 년(十年)이란 긴 세월(歲月)을 소비(消費)하여 이제 겨우 기초 공사(基礎工事)가 끝난 것이다. 지금부터 본건축(本建築)이다. 건설(建設)이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과 같이 대하(大廈)는 단시일(短時日)에 되는 것은 아니다. 십 년(十年)을 불비 불명(不飛不鳴)이라도 명장 경인(鳴將驚人)하고 비장 충천(飛將衝天)할 때가 있는 것이다. 꾸준한 인내(忍耐)와 끊임없는 노력(努力)은 필경 대하(大夏)를 완성(完成)하고 말 것이다. 평탄한 들길에는 절룸바리(→절름발이) 병신(病身) 말로 달릴 수 있거니와 험준(險峻)한 산악(山嶽) 길에 비로소 건각(健脚)을 자랑할 수도 있으며, 풍랑(風浪)이 심(甚)할수록 뱃사공의 묘기(妙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역경(逆境)을 극복(克服)하고 애로(隘路)를 개척(開拓)하는 묘미(妙味)는 체험자(體驗者)만이 맛볼 수 있는 진미(眞味)다. 우리는 해인(海印)의 대학원(大學園)을 건설(建設)하는 데 앞으로 닥쳐올 가지가지의 애로(隘路)와 난관(難關)을 응시(凝視)하면서 결심(決心)을 새로이 하고 금강 불양(金剛不讓)의 비상(非常)한 각오(覺悟)를 가져야 한다. 적으나 크나 건설(建設)의 기쁨을 제호미(瑅瑚味)로 삼고 일보 이보(一步二步) 전진(前進)이 있을 뿐이다.

  빈약(貧弱)하나마 학보(學報)를 처음 내는 기쁨. 이 기쁨을 영원(永遠)히 살리기 위(爲)하여는 동학 제군(同學諸君)의 끊임없는 지성(至誠)이 필요(必要)함은 물론(勿論)이려니와 사회(社會) 유지 제위(有志諸位)의 부단(不斷)의 편달(鞭撻)이 더욱 필요(必要)한 것이다. 이 학보(學報)를 대해인(大海印) 건설(建設) 공정(工程)이 시작(始作)되었다는 신호(信號)로 삼아 한반도(韓半島)의 남단(南端)을 장식(裝飾)하는 특징(特徵) 있는 대학원(大學園)을 건설(建設)해 보기로 하자.

  유언 불행(有言不行)은 무신자(無信者)의 망발(妄發)이라 논외(論外)로 치고 무언실행(無言實行)은 미덕(美德)이나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이다. 유언 실행(有言實行)만이 현(現) 사회(社會)의 요구(要求)를 충족(充足)하는 방법(方法)이다. 입과 말을 통(通)하여 이미 한 일을 알리고 다음 할 일을 예고(豫告) 또는 촉구(促求)하여 유언 실행(有言實行)의 효과(效果)를 걷우게(→거두게) 하는 것이 이 학보(學報)의 사명(使命)일 것이다. 대해인(大海印)을 건설(建設)한다고 했으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意味)하는가를 동학 제군(同學諸君)과 함께 내용(內容)을 검토(檢討)해 보는 것도 차제(此際)에 무의미(無意味)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첫째, 훌륭한 교사(校舍)를 마련하여 최고(最高) 학부(學府)다운 위용(威容) 갖훌(→갖출) 것,

  두째(→둘째), 도서관(圖書館) 시설(施設)을 완비(完備)하여 연구(硏究)에 지장(支障)이 없도록 할 것,

  세째(→셋째), 체육장(體育場) 시설(施設)을 정비(整備)하여 체육(體育) 향상(向上)에 이바지할 것 등(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해인(大海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것은 외형(外形)에 불과(不過)한 것이고 대해인(大海印)의 내용(內容)은 아니다. 그 같은 외형적(外形的) 시설(施設)도 필요(必要)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內容) 충실(充實)에 비(比)하면 오히려 필요 불가결(必要不可缺)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해인(大海印)은 첫째 훌륭한 교수(敎授)님을 모셔서 연구 발표(硏究發表) 실적(實績)으로 학계(學界)에서 권위(權威) 있는 존재(存在)을 인정(認定)받아 전국(全國) 학도(學徒)로 하여금 동경(憧憬)의 배움터가 되게 할 것.

  두째(→둘째), 해인대학(海印大學) 재학생(在學生)은 물론(勿論) 졸업생(卒業生)으로 사회(社會)에 진출(進出)한 후(後)에도 인격상(人格上)으로나 학문상(學問上)으로나 일반(一般)이 신뢰(信賴)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

  이 두 가지 요소(要素)를 구비(具備)함으로써 대학(大學) 교육(敎育)을 지향(志向)하는 전국(全國) 학도(學徒)들이 서울이나 부산(釜山)보다 마산(馬山)을 제일(第一) 희망지(希望地)로 선택(選擇)하게끔 되는 데에서 비로소 대해인(大海印)의 면목(面目)이 약연(躍然)하게 될 것이다. 외형적(外形的) 시설(施設)이 아무리 좋더라도 빛 좋은 개살구 격(格)이 되어서는 아무 소용(所用)이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物質文明)의 선구자(先驅者)인 선진 제국(先進諸國)의 외형(外形)을 따르기 위(爲)하여 아무리 발버둥 쳐 보았자 외형(外形) 경쟁(競爭)은 언제나 일보(一步) 후진(後進)의 고배(苦盃)를 면(免)키 어려울 것이다.

  고래(古來)로 우리나라의 학자(學者)님들은 형설(螢雪)의 공(功)을 금지옥엽(金枝玉葉)같이 찬양(讚揚)한다. 국토(國土)의 칠 할(七割) 이상(以上)이 산악 지대(山岳地帶)로 가난한 살림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당시(當時)에는 기름불이나 관솔불로써도 밤공부를 할 여력(餘力)이 없어서 여름에는 개똥벌레들을 잡아 그 형광(螢光)으로 책을 비춰 가며 공부(工夫)를 하였고 겨울이면 눈빛을 이용(利用)하여 공부(工夫)한 끝에 마침내는 대학자(大學者)가 되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빈한(貧寒)한 집에서 학자(學者)가 난다는 의미(意味)일 것이나 학교(學校) 시설(施設)의 호불호(好不好)에도 적용(適用)될 수 있는 것이다. 시설(施設)이 좋다고 반드시 좋은 학자(學者), 좋은 학생(學生)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시설(施設)이 부족(不足)하다 하여 좋은 학자(學者), 좋은 학생(學生)이 나지 못한다는 법(法)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학 설치 기준령(大學設置基準令)은 너무나 국민 경제(國民經濟)의 실정(實情)을 도외시(度外視)한 외형(外形) 치중(置重)의 감(感)이 있다고 아니 느낄 수 없다. 선진 국가(先進國家)의 국민생활(國民生活) 수준(水準)에 비교(比較)하여 과연(果然) 우리나라 수준(水準)이 어느 정도(程度)에 있는가? 국민생활(國民生活)과는 너무나 동떨어져서 학원(學園)만의 독선적(獨善的) 시설(施設)을 요구(要求)하는 것은 결국(結局) 학생(學生) 부담(負擔)의 무리(無理)를 초래(招來)하고 나아가서는 사립 재단(私立財團)의 파탄(破綻)을 가져올 우려(憂慮)도 없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설면(施設面)을 등한시(等閑視)한다는 것은 아니다. 요(要)는 외형적(外形的) 시설면(施設面)보다 내용적(內容的) 학원(學園) 분위기(雰圍氣) 조성(造成)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해인대학(海印大學)의 건학 정신(建學精神)에도 합치(合致)되는 논점(論點)이다.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은 결(決)코 외형(外形)이 아니고 내용(內容) 충실(充實)을 말하는 것이다. 계(戒)는 계율(戒律)을 말하는 것인데 법률(法律), 즉(卽) 행(行)을 의미(意味)하는 것으로 사람다운 인격(人格)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意味)이고, 정(定)은 선정(禪定)의 뜻인데 태산 부동(泰山不動)의 담력(膽力)과 수업력(修業力)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혜(慧)는 지혜(智惠), 즉 학문(學問)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다. 혜(慧)는 지식(知識)과는 조금 차이(差異)가 있다. 세지(世知), 간지(奸智)는 혜(慧)의 범주(範疇)에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정당(正當)하고 인격(人格)을 토대(土臺)로 하여 인류 사회(人類社會)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견(知見)을 말하는 것으로서 악지 간계(惡智奸計)와는 서로 상반(相反)되는 것이다.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야말로 석가(釋迦) 교훈(敎訓)의 진수(眞髓)인 동시(同時)에 대해인(大海印) 건설(建設)의 기본 강령(基本綱領)이다. 우리는 이 강령(綱領) 밑에 굳게 뭉쳐 대해인(大海印) 건설(建設)에 확호 부동(確乎不動)한 신념(信念)을 가지고 용약 매진(勇躍邁進)할 것을 거듭 맹세(盟誓)하며 이번 학보(學報)를 창간(創刊)함에 당(當)하여 삼가 머릿말(→머리말)에 대(代)하는 바이다.

<참고>

  1. 한자는 창간사에 바로 노출되어 있지만, 읽기의 편의를 위해 ( ) 안에 넣었다.
  2. 현행 맞춤법과 어긋난 표현은 원본 그대로 적고, (→ )로써 현행 맞춤법을 보이었다.
  3. 띄어쓰기는 현행 규정에 맞게 손질하였다.
  4. 거의 구두점이 찍혀 있지 않지만, 마침표는 필수적으로 넣었고 나머지 구두점은 최소한으로 하여 찍었다.
  5. ‘生覺, 敎授任, 學者任’ 등은 잘못된 한자 표기이거나 잘못된 한자가 들어 있기에, 각각 ‘생각, 교수(敎授)님, 학자(學者)님’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