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 2929] 익숙해진 그 말, ‘젠더화’ 된다는 것

2019-04-15     박예빈 기자

  초등학생 시절 여성은 고무줄 놀이, 남성은 축구 하는 것이 성별 놀이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런 발상은 ‘이상하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시대다.

  나는 유년 시절 땀을 흘리고, 과격한 운동은 좋아하지 않았다. 현재 유년 시절 기억은 옅어졌고, 운동하지 않는 이유는 귀찮아서다. 그래서 과격한 운동 대신 여학생들이 즐기던 공기 놀이, 고무줄 놀이를 했다. 그때 기억은 이렇다. 여학생은 “남자가 무슨 고무줄 놀이를 해.”, 남학생도 “그래, 무슨 남자가 고무줄 놀이야, 같이 축구 경기나 하자.”라고 했다. 당시 나는 젠더 역할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기에 그들의 요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말했던 남자 친구가 기억난다. 그 시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하는 대목이다. 친구는 주변 사람이 요구하는 젠더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왜?”라고 반문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고무줄 놀이를 즐겼다. 어린 시절 그는 ‘나에게 기대되는 젠더 정체성이 나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고 인지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은 동일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수의 생각과 맞서기는 힘들다. 싸우고 설득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고 따르는 게 편하다. 하지만 그런 태도에 익숙해지면 무엇이 옳고 그릇되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가끔 누군가는 항의하고 싸워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이해하는 척 타인의 옳고 그름을 평가해 왔던 건 아닌지, 이해받지 못할까 두려워서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외면한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더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기 전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보자. 그때, 유년기 남자 친구의 질문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사회문화적 실천을 통해 성별 차이를 구분 짓고, 다르게 기대하는 역할을 습득한다. 이를 다른 사람과 관계 속 실천을 통해 구조화한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 차이에 서로 반하거나 이질적인 요소로 규정하고, 가치판단을 투입해 성별 간 위계가 발생 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학습해 온 ‘젠더 정체성’은 가족, 학교,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와 주변 관계를 통해 계승되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여자니까 조신하게 행동해야지.”, “사내자식이 울면 못써!”라는 말을 쉽게 들었다. 무의식 중에 젠더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강요되어 온 것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평등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선 조건문을 인지하고 “왜, 진짜?”와 같은 역발상으로 상식과 반대되는 생각을 해보자. 이제라도 어디서부터 내가 타고난 기질이고, 무엇이 사회적 요구로 받아들인 기질인지 ‘남성으로서, 여성으로서’가 아닌 ‘나만의 정체성’을 먼저 확립해야 한다.

허지원(사회학과·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