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나의 연구, 나의 교육] 말이 씨가 된다는 말

2024-08-20     언론출판원

  옛 속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문인이자 정치가인 한강 정구(鄭球)가 1586년 함안군수로 부임할 때 함안 땅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풍수지세(風水地勢)로 물이 거꾸로 흐르는 역모(逆謀)의 기운이 있다하여 남쪽의 높은 산은 배들이 드나들 만큼 낮다는 뜻의 여항산(艅航山)으로, 북쪽의 낮은 평야는 높은 산을 뜻하는 대산(代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민간에서 전해 오는 속설에 불과하지만 우리 옛사람들이 얼마나 언어 사용에 신중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쓰는 속담 가운데 ‘말이 씨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기에 평소에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하라는 경고성 의미로 주로 쓰인다. 가끔씩은 말처럼 어떤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도 이 속담을 쓰기도 한다. 말 속에는 분명 보이진 않지만 어떤 기운이 작용하고 있다는 믿음이 이 속담 저변에 깔려 있다. 이처럼 말 속에 보이지 않는 영(靈)이 깃들어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믿음이 한국과 중국, 일본에 널리 퍼져 있는데 이를 언령신앙(言靈信仰) 혹은 고토다마신코라고 부른다.

  흥미롭게도 언어학에서는 말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가설이 존재한다. 이를 ‘언어결정론’ 혹은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 부르는데, 20세기 초반 미국 구조주의언어학자인 사피어(E. Sapir)와 워프(B. Whorf)가 제시한 언어이론으로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 행동 성향을 온전히 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람의 상대적인 사고와 행동 유형을 구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말해 말본새는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언어이론은 세계 각국의 언어가 저마다 다른 민족성 혹은 국민성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논리로도 확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국어는 죽음에 대한 어휘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인데 이는 중국인들이 다른 어떤 언어권 사람들보다도 숙명론적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와 의식 수준을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물론 말이 사람의 모든 외면과 내면을 좌지우지한다는 극단적인 언어결정론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말본새가 사람의 고유한 사고와 행동 유형을 상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입장은 대체로 수긍할 만하다. 의상디자이너가 옷매무새만 봐도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듯이, 말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 성품을 직접적으로 때로는 은연중에 드러내 준다. 예를 들어 감성이 풍부한 아이는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도 감성 어휘를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구사하고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순간적으로 쏟아내어 말로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은 보통 성격이 급한 사람이거나 남에 대한 배려심이 적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어딘지 모르게 말소리가 어눌하고 작다면 평소 자신감이 없거나 성격이 소심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반대로 허풍스런 말투와 일부러 큰소리로 자랑하길 좋아하는 사람의 말투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한 위장전략(僞裝戰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말본새만큼 정확하게 그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표식(表式)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부지불식간에 씨가 되고 싹을 틔워 부메랑처럼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권종일(영어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