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영지] 반복되는 ‘비호감 선거’
선거를 혹평하는 일도 이제 일상적인 현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지난 20대 대선을 두고 언론에서는 ‘역대급 비호감 선거’와 같은 머리말로 선거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전하곤 했다. 대부분의 후보가 가졌던 높은 비호감 여론이 그 까닭이었다. ‘역대급’, ‘전례 없는’ 등의 강렬한 수식어가 붙었던 당시 신문의 지면들을 생각해 보면, 20대 대통령 선거만이 가졌던 특징이 있던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런 걸까. 한국의 정치 지형 자체가 갖는 문제는 없을까.
이번 22대 총선에서도 역대급 비호감이라는 수식어는 재차 등장했다. 당대표를 맡기도 했던 여당의 지역구 출마자는 선거운동 기간 중 같은 표현을 사용해 경쟁 정당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비호감이라는 프레임은 선거를 앞둔 상황마다 등장하는 상투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일부는 이러한 ‘비호감’ 프레임을 두고 대안적인 정치 세력의 부재에서 이유를 찾는다. 87년 체제 이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 구도는 여전히 양당 구도 체제다. 자신을 잘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정당보다는 뽑힐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양당 중 하나에, 최선보다는 차악에 투표하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선거는 바람직한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뿐더러,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로 연결될 수도 있다. 때문에,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강요하는 구도에 균열을 내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롭다는 점 자체로 제3의 세력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양당과는 차별화된 정치를 선보인다며 출범한 수많은 정당이 결국엔 양당에 편입되거나 위성정당으로 전락한 모습을 우리는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럼에도 유권자의 정치 지향을 뭉개는 현 양당제가 문제라는 점은 사실이다. 이념이나 지향보다는 이기기 위한 선거 공학만 존재하는 정치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공론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상대 정당에 대한 심판이라는 대의만을 요구한 끝에 구성된 지난 21대 국회에서 청년, 노동자, 여성, 성소수자의 목소리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번 총선으로 선출된 국회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투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투표로 얻을 수 있는 유권자로서의 효능감이 사라지고, 그저 의무감만으로 용지에 도장을 찍는다. 공허한 선거다. 덜 싫어하는 후보가 아닌, 좋아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선거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