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교권’이라는 말

2023-10-11     원지현 기자

  학부모의 악성 민원과 지나친 간섭에 시달리던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교사의 교육 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9월 4일에는 전국 주요 도심지에서 이와 관련된 교사들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비단 교사가 아닌 대다수의 국민 역시 교육 환경을 개선하라는 구호에 동의하며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정치권 역시 이에 호응해 여러 대책을 발표하는 상황이다.

  더 이상 교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말자는 유례 없는 규모의 구호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된다. 많은 이들의 추모 물결을 낳았던 서이초 교사의 죽음을 비롯해 취약한 학교 현장의 소식이 퍼지며 현재 교사가 학교에 얼마나 무방비한 위치에 놓여있는지는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명백한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는 이견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들의 죽음이라는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되는 키워드는 ‘교권’이다. 서이초 추모 집회에 참여한 교사들이 내놓은 구호의 주된 키워드는 교권이었다. 교육 현장 붕괴의 원흉으로 지목하며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정치권 발언들의 근거도 교권이었다. 그렇다면 교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사전에 따르면 교권이란 교사로서 지니는 권위나 권력이다. 넓은 의미에서 교사가 교육할 권리를 뜻하기도 한다. 현재 교권을 둘러싼 수많은 구호에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각각의 발화자가 투사하는 정견이 혼재되어 있다. 악성 민원으로 인해 침해받는 교육할 ‘권리’를 보호하자는 교원단체의 요구부터 학생 인권의 보장으로 교사의 ‘권위’가 추락 했으니 체벌을 부활시키자는 보수 정치권의 욕망까지. 권리 보장에 대한 외침과 악습으로의 회귀에 대한 바람이 뒤섞였다. 그렇기에 교권이라는 구호는 모호하다. 교사의 권리에 대한 합리적인 요구와 ‘학생 대 교사’라는 악의적인 프레임을 한데 모아 납작하게 만든다.

  문제를 선명히 바라보기 위해선 해당 문제를 어떤 언어로 부를지 고민해야 한다. 교사가 학부모의 폭언을 듣는 일,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는 일은 노동자로서 겪는 부당함이다. 이 부당함을 학교나 제도의 보호 없이 교사 개인이 오롯이 감내하도록 방치하는 구조 역시 노동자로서 합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기에 발생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는 교권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아닌 ‘노동권’으로써 다뤄야 할 사항이다. 꼭 교권이라는 단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나도 체벌이 성행했던 시절에 의무 교육을 받았다. 나와 내 동기들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떨 때는 교사 본인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뺨을 맞고 배를 걷어차인 적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현재 교사들이 겪고 있는 부조리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데 일말의 다른 견해를 갖지 않는다. 다만 내가 겪었던 폭력의 근거로 쓰여온 언어가 이번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는 생각에 반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