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10·18문학상 현상 공모- 수필 '세상은 원래 이래'

2021-12-01     정주희 기자

수필 부문 가작: 김문성(국어교육과·2)

세상은 원래 이래

                                           

<chapter1>세상은 왜 이래?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기 마련이다. 세상에 대해서 고민하는 과정의 일련으로 종교가 발전했고 철학이 발전했고 오늘날에 이르러 과학이 발전했다. 나 또한 그렇게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관찰하고 고민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이다. 세상은 왜 이래?

 역사의 반증이 그러하듯 흥망성쇠가 필연적인 이 세계의 가치들은 종말을 늦추고자 첨예히 대립하고 있다. 밀도로 따지자면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인데 끝나기 마련일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언제나 선전포고의 효시였다. 필멸이 전제된 이데올로기라는 허상이 이 세계에 남아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허나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동안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지향하는 연약한 우리들에게 이데올로기적 유대 없이 사는 것도 어쩌면 어불성설. 다만 책임은 기득권이 지지 않았다. 영화 <미션> 中
그래서 순교를 했고 그래서 과라니족은 전사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말의 반증이니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는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든 노릇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야당과 여당으로 나뉘어야만 했고, 좌파와 우파가 나뉘어야 했으며, 남성과 여성이 나뉘어야 했고, 선과 악을 판단했다. 그리고 싸워야만 했다. 세상은 이렇게도 불의하다.

 

<chapter2>그 인간은 왜 이래?

  내가 교회를 나가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나는 교회와 함께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섬기기로 자원했다. 그때 당시 우리 주일학교는 작은 교회였지만, 아이들이 정말 많아지기 시작할 때였다. 다만 동네 특성상 결손가정의 비율이 상당했는데 우리 교회 학생들은 대부분 이에 속해있었다. 신의 존재자체에 중립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생각했을 것이다. 도대체 신은 무슨 대의를 위해서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을 이런 대우를 받게 하고 이런 아이들로 자라게 해야 했는가?

   가정의 방치는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알파벳을 읽을 줄 모르는 고3, 사칙연산을 할 줄 모르는 중2, 말하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초등학교 4학년생 등등. 이보다 심각한 것은 그들은 기본적인 감정표현, 감사표현을 할 줄도, 할 필요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불공평이 있지만 그들은 가장 안타까운 불공평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출발선,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사랑받는 것에도 출발선이 있다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했던가, 사랑도 받아본 아이들이나 받을 수 있는 과분한 것이었다. 지난 몇 년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아이들이라 부르시며 매주 아이들을 위해 매주 맛있는 것을 사주셨고, 좋은 옷을 입히시고, 나들이를 데려가셨다. 보통의 출발선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선을 선으로 갚으려고 하겠지만 이 아이들은 받아본 적 없는 대우와 애정에 고장나기 일쑤였고 선을 악으로 갚는 데에 매우 열심이었다. 일례로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 같은 것들을 준비할 때 모두 사비로 지출을 감당해오는 몇 년간 부모로부터 회비 한 번 받지 못했다. 사정이 녹록치 않다면 지원해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안내도 된다는 인식으로 정립된 모양이었다. 사례의 나열은 이제 와서는 무의미하기에 일례로 끝내는 것이 좋겠다.

 살아가는 동안 가장 많이 무너졌던 시기였다. 교육자를 꿈꾸던 청년은 교단에서의 낭만이 철저히 부서지고 남겨진 현실에 직면하였다. 더 이상 아이들 앞에 서기 싫었고 [일탈하는 아이들을 위해 교사로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라는 교수님의 질문에도 이 낮은 짐승들을 보기 전까지 꿈꿔왔던 낭만적인 모범답안을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을 보며 교사의 꿈을 버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사의 꿈을 버리기 직전까지 만든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 인간들은 왜 이래?’

 

<chapter3>세상은 원래 이래,


 그 인간은 원래 이래.

 고교3학년 역사 수업을 할 때였다. 근대역사를 배우던 중 역사 선생님은 목사님의 아들인 내 친구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신이 있다면 왜 그 신은 아편전쟁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으며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는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 신의 일이냐? 신이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아마도 그 선생님은 세상이 왜 이런지에 대한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세상이 불의하다라는 명제는 참이란 결론을 지은 것 같았다. 고등학생이 대답하기에 너무 어렵고철학적인 질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도 그 질문을 곱씹는 가운데 정립하고 있는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왜 이럴까하니 인간사는 세상은 원래 이랬다.

  동전은 앞뒤가 있기 마련이고, 칼날은 양날이기 마련이다. 폭군의 폭정으로부터 민주주의가 태어났고 부르주아가 기득권이 되었을 무렵 반드시 프롤레타리아가 공산주의를 외치기 마련이었다. 각자가 처한 사회의 현실에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역사는 흘러온 것일 뿐, 이 과정에서 신의 개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일절 있지 않았다. 잘못은 인간이 하고 심판은 신이 받는 모양새다. 세상이 불의하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으며 흥망성쇠의 나열일 뿐이었다. 불의한 세상을 뒤엎은 혁명들은 때가 되면 다시 불의해졌다. 그렇게 세상은 항상 불의했고 세상은 원래 이랬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비단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그들의 위치에서 자기의 역할(말 안 듣고 멋대로 하는 것 따위의 행동들)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맞다.

  세상은 원래 이렇듯이 그 인간은 원래 이렇다. 아니 인간은 원래 이렇다.
  그렇다면 나는 원래 이런 세상에서 원래 이런 인간들과 어떻게 살아야할까?

 

<chapter4>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나는 이렇게도 불의한 세상에서 불의한 사람들과 같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이 세계를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나 아무리 원래 이런 세상이라고 다독여 봐도 과몰입하게 되는 사회현상은 항상 생겼다. 그럼에도 그간의 내 행보는 연단의 연속이었다. 가장 낮은 출발점의 아이들과 가장 낮은 출발점의 선생님은 이해할 수 없는 수업을 서로에게 받으며 세상을, 사람을 배워갔다. 그리고 우리는 어쩜 그런 세상에서 원래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 바뀌어갔고 원래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잘 지내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지금 사랑을 온전히 사랑으로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이 되어가고 뭔가를 사주거나 해주면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아이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나는 교사의 꿈이 더 굳세어진 채로 조그마한 아이들의 실수에도 쉽게 지치고 짜증내던 선생님에서 기다리고 정죄하지 않는 선생님이 되어야하는 당위를 알게 되었고 되기 위해 항상 마음을 다잡는다.

   자연스럽게 신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럴까에 대한 고민도, 사람들이 믿는 신이 과연 선한 신일까에 대한 고민도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매주 읽는 성경은 말한다. 공동체에서 사람들과 연합하고 일치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는 불의한 로마정권을 그대로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대로 두어도 된다. 다만 이런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보겠느냐? 각자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나는 나의 역할을 정해야하는 시기가 왔고 그 역할에 맞는 목소리를 내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선생이 되겠습니다. 그 위치에서 이해하지 못할 수업을 해 나가야겠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목소리를 내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현장에서 순교하겠습니다. 앞선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만 함께 죽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10·18문학상 수필 가작 수상 소감

  안녕하세요 수필 ‘세상은 원래 이래’를 쓴 김문성입니다. 좋게 봐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3, 4페이지 분량의 수필을 읽어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는 잘 없겠지만 ‘세상은 원래 이래’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수필이 쓰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것은 비단 창작 활동에 들인 시간뿐만 아니라 교회를 나가게 되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게 되고 무너지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길 수차례 반복한, 앞으로도 반복할 제 경험의 총체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국어교육과를 다니는 만큼 교사를 꿈꾸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주일학교 학생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큰 고통이자 큰 도전입니다. 특히 세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대는 원래 변해”, “세상은 원래 그래”,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사실 이 말들은 목사님께서 제가 넘어질 때마다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아이들을 의연히 감당해낼 때 저는 세상의 아이들과 비로소 함께할 것임을 어렴풋이 보게 됩니다. 그 때까지 더 깨지고 갈려 모나지 않게 둥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 창작물은 그 과정의 첫 산물입니다. 저 스스로에게 의미가 깊은 10.18문학상 수상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수많은 우연과 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