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발밤발밤] ‘3·15청년문학상’ 참가를 권하며

2021-04-12     언론출판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영캠퍼스에 진학은, 어릴 때부터 가졌던 ‘문학가의 꿈’을 이어나가기 위해서였다. 국문과로 가고 싶었는데 당시 우리 대학에 국문과란 학과는 없었다. 그러나 국어교육과가 있었다. 나는 국어과나 국문과나 대동소이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오판이었다. 우리 대학의 ‘국어교사 사관학교’인 국어과에서는 교사가 되는 꿈만 허용됐다. 그래서 교사를 꿈꾸던 집단에서 ‘시인의 꿈’을 가진 나는 외톨이 신세였다.

  스무 살 청년이 꾸던 꿈은 어디에서든 적응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가난한 홀어머니의 자식이었기에 진해서 대학까지 왕복 차비와 점심 라면 값이 하루 용돈의 전부였다. 커피 한 잔의 낭만이 허용되지 않도록 빠듯했다.

  그 덕에 나는 술과 담배를 배우고 즐길 여유가 없었다. 그 어렵고 가난했던 시인의 꿈에 가끔은 배부른 날이 있었다. 그것이 대학 학보사에 투고한 문학작품의 ‘원고료’였다. 당시 대학보에 시가 게재되면 3천 원 정도의, 꽤 많은 편인 원고료가 나왔다. 3천 원이면 여전히 제 자리에서 성업 중인 ‘함흥식당’ 갈비탕 두 그릇 값에 가까웠다.

  내가 졸업반이었던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인이 되고 한국일보에 시를 발표하면 3만 원의 원고료를 받았다. 그것과 비교해 봐도 나는 당시 우리 대학보사 원고료가 가난한 대학생에겐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 큰 선물은 대학 교지였던(그땐 교지가 연간지로 나왔다) ‘월영문화’에서 현상(懸賞)공모하던 ‘월영문화상’에 입상하면 좀 더 넉넉한 비상금이 만들어졌다. 입학 당시 나는 소설가를 꿈꾸었다. 월영문화상 소설 입상으로 기고만장하던 일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땐 ‘대학문단’이 존재했다. 기성문인으로 등단하기 전에 대학문단에서 전국 대학생 문사들이 자웅을 겨뤘다. 나는 월간 시문학, 한국문학, 고대신문사, 영남대 천마문화상, 계명문화상 등에서 상과 상금을 받아 그 덕에 대학을 다녔다. 그랬으니 문학이 얼마나 고마운 꿈인가.

  지금 우리 대학에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 현상공모가 ‘10·18문학상’이 있다. 여기에 전국 대학생(휴학생 포함)을 대상으로 한 ‘3·15 청년문학상’이 있다. (사)3.15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시(250만 원), 소설(350만 원), 동화(200만 원) 등 많은 상금으로 오는 16일까지 작품을 받고 있다.
우리 대학은 ‘교육이 강한 대학’이다. 여기에 더해 ‘문학이 강한 대학’이기도 하다. 지금 문단에 많은 우리 졸업생들이 큰 활약을 하고 있다.

  제2회 3·15청년문학상은 학우 여러분에게도 도전이며 기회일 수 있다. 도전하길 권한다. 학창시절 문학이라는 열병에 걸려보는 것, 결코 나쁘지 않다. 예전에 원고지에 펜혹이 생기도록 아프고 힘들게 글을 썼지만, 이제는 얼마나 편한가.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며 자신의 길을 만들어 보길!

석좌교수·청년작가아카데미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