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 2929] 긍휼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어젯밤, 집에서 가족들과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미국에서 일어나는 동양인을 향한 혐오 범죄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경악스러운 동영상이 함께 나왔다. 덩치 큰 백인 남성이 키 작은 중국계 미국인 여성을 밀쳐서 신문가판대에 머리가 부딪치게 됐고, 또 힘없는 동양인 노인을 밀쳐서 노인이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현재 인류는 모두 팬데믹을 겪고 있다. 이에 대한 불만과 화풀이의 화살이 모두 동양인을 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중국도 현재 상황에 대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 일이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지기 전에, 힘들게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말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종종 언급되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한 시골 마을의 성당에서 한 신부가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부 곁에서 시중들던 소년이 실수로 포도주잔을 쏟아버렸다. 신부는 소년에게 화를 내며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마라” 하고 호되게 나무랐다.
다른 성당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신부는 “괜찮다. 나도 어렸을 때 실수를 많이 했단다. 힘내거라”라고 소년을 다독여줬다. 성당에서 쫓겨났던 그 소년은 유고슬라비아의 악명높은 독재자가 된 조셉 브로즈 티토였고, 포도주를 쏟고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위로를 받은 소년은 천주교 대주교가 된 풀턴 쉰 주교였다. 누군가를 위한 긍휼한 마음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격과 인생을 크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코로나에 감염됐다가 이제는 완치된 김 씨의 한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김 씨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 “어쩌다 걸렸어?”, “조심하지 그랬어.” 등의 위로인지 질타인지 모르는 말들을 들었다고 한다. 또 재택근무를 하면서 하루아침에 벌레가 된 카프카 소설 ‘변신’ 속 주인공처럼, 감염병을 옮기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김 씨는 사직을 권유받았고, 결국 회사를 떠났다.
“코로나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고가 아녜요. 인류의 인격에 보내는 경고라고 저는 생각해요.” 김 씨는 복귀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밀쳐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완벽한 방역이란, 병이 완치돼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나 역시 김씨가 코로나로 힘들어할 때, 그에게 응원과 위로를 해줄 수 있었을까? 막상 닥쳤을 때는 나 또한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코로나로 모두에게 여유가 사라진 지금,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어떨까.
황지운(국어국문학과·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