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냄새, 이원수 문학관에서 찾다
고향의 봄 냄새, 이원수 문학관에서 찾다
  • 김준휘 기자
  • 승인 2018.04.0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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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노래 ‘고향의 봄’이다. 이 노래는 한국 아동 문학의 거장, 동원 이원수 선생이 만들었다. 이 노래의 배경지와 이원수 문학관을 알아보자. / 문화부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에 위치한 고향의 봄 도서관, 지하 1층에 이원수 문학관이 있다.<br>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에 위치한 고향의 봄 도서관, 지하 1층에 이원수 문학관이 있다.

동원 이원수와 고향의 봄

  앞서 ‘이달의 지역인’에서 알 수 있듯 동원 이원수 선생은 한국 아동 문학계의 거장이다. 동화, 동시, 아동 소설 등 수많은 작품을 출판했다. <고향의 봄>은 1926년 월간 아동 문학지 『어린이』의 4월호에 당선되고, 1927년 홍난파의 작곡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원수 선생이 양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고향의 봄 배경지를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원수 선생은 “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만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중략)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그리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며 <흘러가는 세월 속에(1980년, 소년)>에서 그 배경을 회상했다. 노래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와 ‘파란 들 남쪽에서’는 천주산과 남산에서 뛰어놀던 때를 말한다. 그리고 소답리의 마을을 새터라고 불렀는데, ‘꽃 동네 새 동네’가 이곳이다. 고향의 봄 가사 하나하나가 창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봄과 이원수 문학관

  이원수 문학관은 창원시 의창구 서상동에 있는 고향의 봄 도서관 지하 1층에 있다. 사단법인 고향의봄기념사업회에서 2003년 12월, 더 많은 사람에게 이원수 선생의 작품과 문화 업적을 알리기 위해 이원수 문학관을 건립했다. 다른 문학관보다는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이곳에는 이원수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별도의 관람료는 없으며 관람 시간은 주중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9시~오후 6시이고, 주말은 오전 9시~오후 5시까지다. 정기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과 신정 그리고 명절이다.

  이원수 문학관에서는 연중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중 4월의 행사는 5일 창원시립합창단 178회 정기 연주회인 칸타타 고향의 봄에 이어 봄을 맞아 ‘제27회 고향의 봄 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이 축제는 7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제32회 시민 학생 미술·서예 실기 대회, 고향의 봄 백일장 등 11개의 주제로 개최된다. 또한, 연중 행사로 고향의 봄 배경지를 알리기 위해 40명 정도의 단체 인원이 버스를 타고 돌아보는 고향의 봄 문학 기행도 시행하고 있다.

이원수 문학관과 동원의 고향

소답동에 있는 명예 도로 ‘고향의 봄 길’
소답동에 있는 명예 도로 ‘고향의 봄 길’

  창원에는 이원수 문학관 외에도 여기저기서 이원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원수 선생의 작품에서 ‘정서적 샘’과도 같은 천주산은 봄이 되면 형형색색의 진달래와 철쭉이 피어난다. 현재 고향의 봄에서 파란 들로 표현된 남산은 옛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지만, 복숭아꽃과 살구꽃, 미나리 밭과 보리밭이 한껏 봄 내음을 더했다고 한다.

  창원 마산합포구 일대에도 이원수 선생과 연관된 장소가 눈에 띈다. 이원수 선생이 졸업한 마산공립보통학교와 마산상업학교는 현재 성호초등학교와 용마고등학교로 계속되고 있다. 장군천과 철길 그리고 아름다운 마산 바다는 이원수 작품의 배경지이다. 옛 마산 형무소 터는 이원수 선생이 1935년 반일 문학 그룹 ‘독서회’ 사건 당시 감옥 생활을 했던 곳이었다. 1936년 6월 부인인 최순애와의 신혼 살림을 차렸던 곳에는 그때의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산호공원에 있는 고향의 봄 노래비는 1968년에 어린이들과 지역 문인들의 성금으로 세워져 더욱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고향을 저버린 친일 활동, 어떤 것이 진실인가

  2002년, 동원 이원수 선생이 일제강점기 당시 몇 편의 친일 작품을 발표한 것이 밝혀졌다. 그 작품으로는 <지원병을 보내며>, <낙하산>의 동시 2편과 자유시 <보리밭에서-젊은 농부의 노래> 1편, <고도감회>와 <전시하 농촌 아동과 아동문화>라는 수필 2편으로 총 5편이 발견되었다. 함안금융조합에서 일하던 1942년과 1943년 사이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인 『반도의 빛』에 발표한 것이다.

  장진화 사무국장은 이원수 선생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작가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에 돌아왔기에 친일 작품이나 일제의 탄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죠. 하지만 이원수 선생님은 가난했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원수 작품에서 보아도 그의 가난한 생활을 알 수 있다. “감옥에 갔다가 집행유예 5년을 받고 함안금융조합에 복직했어요. 생계도 유지해야 하는데 자신이 일하고 있는 금융조합의 사보에 글을 내라고 했을 때 안 내고 버틸 수 있었겠느냐는 의문이 들죠.” 이원수 선생은 다른 친일 작가와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 당시 친일 작가들은 신문 등에 적극적으로 발표했지만 이원수 선생님은 금융조합의 사보에 5편밖에 없어요. 물론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전, 이후의 삶을 보아 달리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1980년 <털어놓고 하는 말>에서 이원수 선생은 이야기한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구백삼십칠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중략)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지도 모르고.” 친일 활동은 분명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가 살기 위해 한 일인가, 혹은 정말 친일을 도모했는가. 알 수 없지만 아동 문학에 있어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장 사무국장은 우리 학우에게 전했다. “요즘엔 우리 지역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우리 지역에 뭐가 있는지, 어떤 유명한 사람이 있는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어요.” 북한에서는 고향의 봄이 인민가 다음으로 많이 불린다. 일본 교과서에 실리거나 해외에 있는 동포들도 고향의 봄을 부를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함께할 수 있는 노래 고향의 봄. 그 배경지가 창원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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