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의 발밤발밤] 청춘에게 배워라
[정일근의 발밤발밤] 청춘에게 배워라
  • 언론출판원
  • 승인 2019.08.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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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 봉곡로 주택가 2층에 거처를 두고 봄을 보내고, 여름을 견디며, 가을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지구가 가장 더운 여름 기록을 세운 2019년, 창원의 여름 역시 지독했습니다. 매일 폭염주의보나 폭염경보가 내리고 열대야는 기본이었지요. 해가 뜨면 폭염방지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외출은 길가에 그늘이 드리우면 나서곤 했습니다.

  제가 봉곡로, 봉림로, 사림로가 얽혀서 지나가는 곳에 살면서 가장 자주 들리는 곳이 생겼습니다. 젊은 남매가 운영하는 ‘북앤샵 오누이’입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누나와 사진을 전공한 남동생이 함께 운영하는 북카페입니다. 좋은 신간도 소개하고 중고 카메라와 필름을 판매합니다. 종류가 몇 안 되는 커피가 있는데 저는 늘 한 가지만 마십니다. 단골인 셈입니다.

  저는 두 남매의 경영철학이 좋습니다. 낮 12시에 오픈을 하고 오후 6시에 문을 닫습니다. 자신들 생활과 여유를 즐기며 하루 6시간 문을 엽니다. 일은 남매가 번갈아 합니다. 이틀에 6시간 일하는 것입니다. 공간은 10여 평, 의자 10여 개. 책장이 있고 빈 벽에는 전시회란 이름으로 개인 그림이 소개됩니다. 주택가 끝머리, 버스가 다니는 도로가 이어지는 가까운 곳입니다. 제 집에서 200m쯤 거리입니다.

  자기 작업을 하면서 작은 북카페를 운영하는 남매가 부러웠습니다. 처음엔 제 신분을 밝히지 않고 단지 같은 동네 사는 ‘노인’을 자처했습니다. 이사 와서 사람들이 보고 싶을 땐 오누이 큰 유리창을 통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봉림고와 경남관광고 학생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제 사는 집을 ‘적막강산’이라 칭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면서 사람을 보는 것이 힘이 된다는 것을 그곳에서 느꼈습니다.

  가끔 남매와 이야기도 하고 젊은 작가들의 책도 읽고 그 공간에서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단골이라 칭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입니다. 참, 밤에 불이 켜질 때가 있는데 그땐 토론하는 청춘 예술가의 모임이 있습니다. 부러우면 진다고 하는데, 저는 이미 그 청춘 남매에게 졌습니다. 그리고 삶에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 북카페에서 익명인 것이 편했습니다. 소설가 카뮈의 스승 쟝 그르니에의 수필집 ‘섬’에 ‘케르겔렌 군도’라는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그 글에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해왔다.’고 익명의 편함/불편함에 대해 적었습니다.

  얼마 전 그 공간에서 관객 16명과 제가 관여하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의 찾아가는 영화를 상영하면서 제 익명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그 공간이 저를 편안하게 해주고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행복해집니다. 혹시 그곳을 지나가다 저를 보시면 방해하지 마시고 가던 길 가시길 바랍니다. 죄송하지만요.

  사족이지만, 2학기부터 청년작가아카데미에서 ‘시창작’을 다시 강의합니다. 지면이 아니라 월영캠퍼스에서도 반갑게 만나길 바랍니다. 우리가 기다려온 가을에 말입니다.

시인·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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