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민주항쟁, 자유를 얻기 위한 뜨거움!
6·10민주항쟁, 자유를 얻기 위한 뜨거움!
  • 박예빈 기자
  • 승인 2019.06.05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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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관이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1987년 치안부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이렇게 말했다. 20대 청년이 책상을 치는 소리에 놀라서 숨을 거두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이외에도 그 시절 말이 안 되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의 총구는 국민을 향해 있었고 그들의 무차별한 공격으로 수많은 국민은 희생되었다. 격동의 시절, 자유를 얻기 위해 6월은 더 뜨거웠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6월, 지금의 자유를 있게 한 그들은 어떻게 자유를 얻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자. / 사회부

  우리는 인권이 보호되는 세상에서 산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연한 이 자유가 약 30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희생으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졌던 1980년대. 독재에서 자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흐른 피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시민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

독재에서 독재로 1980

  1961년 5월 16일 우리나라는 군부가 무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했다. 온갖 무기로 무장한 군인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정권을 찬탈한 군부 중심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그는 국민의 자유가 아닌 독재를 선택하고 실현했다. 물론 국민들은 독재정권에 반발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체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항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열흘 뒤 박정희는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에 의해 죽게 된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국민들은 이제 자신들을 억압할 누구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해 12월 12일 새로운 독재자가 나타난다. 권력 중심에 서있던 박정희와 김재규가 정권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게 되자 전두환이 독재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군인을 이용해 국민을 억압하려 했다. 하지만 박정희를 몰아낸 국민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1980년이 찾아왔다.

  1980년에 국민들은 전두환을 몰아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계엄령 확대를 시행했다. 시위는 서울뿐만이 아닌 광주에서도 전개되었고 5월 18일 광주는 전두환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항거를 이어나간다. 신군부는 항쟁 당시부터 불순분자 주도설을 퍼뜨리고 언론은 군부의 탄압으로 광주의 민주화 운동을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광주는 고립되어야 할 위험한 곳이었다. 결국 광주 사람들은 전화가 끊기고 외부 사람들과 만나지도 못하고 잊히는 듯했다.

독재에서 자유로 1987

  7년 동안 전두환을 몰아내기 위한 크고 작은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독재정치를 끝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을 모두 잡아서 끔찍한 고문을 행했다. 잡혀간 사람은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거나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중 한 사람이 우리가 아는 박종철 열사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강압적인 탄압에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 이한열 열사다. 두 사람은 전두환이 정권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횡포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20대 청년인 두 사람의 죽음은 민주화 운동에 불을 지핀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열사는 경찰에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물고문을 당하고 사망에 이른다. 당시 그의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묻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세상 밖으로 나와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렇게 만들기까지 많은 이의 노력이 있었다. 그의 화장을 막은 최환 검사, 최초로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한 신성호 기자 등은 억울한 대학생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고 정국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6·10 민주항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인 6월 9일에 민주화를 외치던 이한열 열사는 전경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진다. 그가 쓰러지고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았다. 더는 참을 수 없는 독재였다.

  6월 10일이 되고 정치인들과 재야인사, 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시위 투쟁을 벌였다.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주요 도시에서 많은 차량 경적이 울렸다. “호헌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터졌다. 6월 민주항쟁은 전국 22개 도시에서 시민이 대규모로 참여한 가운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포기란 없었다.

  6월 10일에 시작된 민주항쟁으로 6월 29일에 독재는 끝이 났다. 대선 후보였던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한다. 이후 노태우는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민주화를 위한 요구를 대폭 수용한 시국수습방안(6·29 선언)을 발표한다. 많은 희생으로 정권은 국민들의 손에 쥐어졌다. 희생 속에 피어난 민주주의의 꽃이었다.

  아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많은 희생이 따라 자유를 얻었지만 뺏기는 건 한순간이다. 다수의 국민이 아닌 한 사람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정권은 1987년을 끝으로 없다. 지금은 국민이 원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고를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도 어디든 존재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어쩌면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을 살면서 누구보다 평화를 바랐던 그들을 생각하며 6월을 기리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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