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요동치던 그때를 기억하며
[기자의 눈] 요동치던 그때를 기억하며
  • 박예빈 기자
  • 승인 2019.03.20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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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우리는 일제강점기 속에서 독립을 외쳤다. 발 내디딜 틈도 없이 거리에 빼곡하게 들어선 시민들은 한 손에 태극기를 쥐었다. 일제에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늘어선 태극기 속에 유관순 열사도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그녀는 현재 다시 회상되고 있다.

  올해로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100주년을 기념해 영화 <항거>가 개봉되었다. 이때까지 일제강점기를 담은 영화는 정말 끊임없이 나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영화에 특히 열광하는 이유는 100주년이 가진 의미 때문이다. 100이라는 숫자는 특별함을 부여하기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항거>는 다양한 경쟁작을 제치고 영화 관객 순위 1위로 올랐다.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지만 지금은 100만 관객을 넘기는 기록을 세웠다.

  영화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후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1년을 담았다. 세평도 안 되는 8호실에 수용된 인원이 30명이 넘었다. 누울 자리가 없어서 대부분 사람은 선 채로 걷고 또 걸었다. 열악한 상황은 적당한 타협점을 만들기 위한 일본의 계략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수용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몰았다. 그러나 그 술수가 유관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거칠게 매질할수록 꼿꼿하게 일어서는 그녀는 일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은 감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세평도 안 되는 8호실에서 시작된 만세는 서대문 형무소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일제에 저항한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가로 유관순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고된 고문을 온몸으로 받았다. 고문 강도는 세지고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20년 9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다. 출소를 이틀 앞둔 날이라 그녀의 죽음은 더 안타까웠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 유관순에게 말한다. “만세를 부를 언젠가를 위해 무리하지 말라.” 하지만 유관순 열사는 부를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만세를 외쳤다. 열일곱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을 목숨을 다해 이뤄냈다. 그녀가 지켜나갔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독립 국가를 형성했다.

  기자는 <항거>라는 영화가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별이 아닌 은은한 빛으로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무르길 바란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유관순 열사 혼자 독립을 만든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한다. 8호실을 함께 썼던 김향화와 임명애 그리고 수많은 동지도 독립에 힘을 보탰다. 그들의 노력이 모여 현재 대한민국은 자유와 독립이 보장되는 국가로 자리했다. 자유가 공기처럼 다가오는 이 순간,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과 함께 그들을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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