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천진난만한 여중생이었을 때 일상에 가장 큰 일로 다가온 뉴스가 있었다. 2014년 배가 침몰되어 엄청난 실종자가 발생했다는 뉴스였다. 일명 ‘4·16 세월호 참사’는 당시 기자를 포함한 많은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단원고 학생 324명이 배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객선 침몰이 더 안타까웠던 큰 이유였다. 사람들은 실시간 뉴스를 보고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국민 모두는 하나가 되어 실종자들이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은 그렇게 국민 마음속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세월호 안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도 있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음을 짐작했지만,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 때문에 그들은 선실 안에서 나갈 수 없었다. 승객들 발목을 잡아놓고 선장과 몇 명의 선원은 탈출했다. 그렇게 승객들은 주인도 없는 배에서 한없이 기다리다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을 놓쳤다. 그들은 세월호와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서서히 잠겼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인 ‘골든타임’은 대처할 계획만 세우다 무참하게 흘러갔다.
매년 4월 16일만 되면 친구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은 노란 리본으로 바뀐다. 기자도 그 날은 노란 리본 배경으로 바꾸고 조금이나마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노란 리본의 유래는 미국에서 전쟁터에 나간 가족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는 2014년 세월호 사건에 수백 명의 실종자가 발생하자 그들이 무사 귀환하길 바라면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는 한동안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만든다.’라는 취지에 맞게 하나둘 노랗게 물들어 실종자들을 기다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2015년 1월 4일, 팽목항 인근 부지에 분향소가 마련되었다. 시신이라도 찾고자 하는 의지로 만들어진 뼈아픈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난 3일, 팽목항 분향소가 철거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4년 5개월이 지났고 분향소가 설치된 지 3년 7개월, 세월호가 인양된 지 1년 5개월 만이다. 분향소 설치 때와는 달리, 철거는 너무도 조용했다. 유가족들은 분향소에 있던 영정 사진을 들고 떠났다. 아픈 흔적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다. 끊이지 않던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긴 지 오래다. 시간이 흘러 대다수 국민이 세월호를 잊어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노랗게 물들어 하나가 되었던 우리는 이제 뿔뿔이 흩어져 각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분향소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4년이란 시간은 누군가에겐 길고 어떤 이에겐 짧다. 중학생이었던 기자는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었다. 그 시절 기자에게는 언니, 오빠였던 그들의 시간은 멈춰 나의 동생이 되어 있었다. 세월호에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시간도 그 시점에 멈춰 흘러가지 않고 있다. 뉴스로 소식을 접하던 우리와 달랐다. 차디찬 바닷가에 멈춰있는 그들의 열여덟은 아직도 서글프다. 못다 이룬 그들의 꿈은 바닷가 한가운데 잠겨 있다. 우리는 생각하고 또 아파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예의고 이런 참사의 반복을 끊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