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팥빙수 한 그릇을 들고 연구실 문을 노크한 사람은 뜻밖에도 윤 선생이었다. 몇 달 전 나와 인연을 맺어 오던 장애인 단체로부터 특강 요청이 있었는데, 장애인 인권 교육이라는 주제에 나보다는 윤 선생이 딱 맞겠다 싶어 연결해 주었던 일이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전화 한 통밖에 없는데, 그 작은 일로 장애인 단체에서도, 윤 선생에게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수없이 들었다. 윤 선생의 방문도 그 일로 인한 것이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특강 이후 강의 자리가 계속 이어져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알릴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글 자모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뜬금없는 교수의 질문에 어리둥절해하는 학생들에게 그럼 가장 좋아하는 영어 알파벳이 있는지 바꾸어 질문해 보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답이 쏟아졌다. 제 이름의 이니셜 글자가 제일 많았고, love, happy 등의 첫 글자를 제일 좋아한다는 답도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영어 알파벳처럼 한글 자음에도 관심을 가지자고, 학과와 전공까지 들먹이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했지만, 실은 나도 이전에 한글 자모에 대하여 별 관심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문학 연구를 업으로 하다 보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소박하나마 한글에 정감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글 자모는 ‘ㅅ’이다. ‘ㅅ’이 사람 人자를 닮아서 좋아한다는 말에도 공감이 가고, ‘사랑’과 ‘소망’이 ‘ㅅ’으로 시작해서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ㅅ’이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주는 글자이기에 좋아한다. 초와 불을 이어 ‘촛불’이 되게 하고, 나무와 잎을 이어서 ‘나뭇잎’이 되게 하는 그 사이시옷을 사랑한다. 사이시옷은 받침이 있는 글자에는 굳이 나서지 않고 받침이 없는 글자에만 들어가 완전한 글자로 보이게 한다.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알고 낮은 데서 소임을 다하는 겸손함이 있기에 사랑한다. 또 사이시옷이 들어간 단어는 단어 각각의 뜻이 살아 있으면서, 하나로 묶여 또 다른 의미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역사를 바꾸었던 ‘촛불’처럼 말이다.
나는 사이시옷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각각의 의미를 지닌 두 사람, 두 역할을 이어 주고 묶어 줌으로써 더 새롭고 빛나는 의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윤 선생이 가져다준 시원한 팥빙수를 먹으면서, 꼭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사이시옷처럼 작은 역할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김은정(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