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단어를 찾는 과정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등의 학술적인 근거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람의 정체성이 언어를 경유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하다. 여성과 남성처럼 태생적으로 고정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는 물론이고, 청년이나 노인과 같이 생애주기에 따라 유동하는 개념까지 모두 언어를 매개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이 된다. 이는 처음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서 형태를 얻는다.
스스로를 표현할 말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개인은 언어가 표상하는 이미지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더구나 이러한 동일시는 특정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요소를 반영하기에 소속감을 안겨 줄 수도 있다. 어떤 사회 의제의 지지자로, 또는 비판자로 본인을 호명하는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절차가 된다. 호불호를 떠나 우리는 늘 정체성을 설명할 언어를 요구해 왔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걸맞다고 느끼는 말을 단순히 외치는 것만으로는 정체성을 얻지 못한다. 정확히는 인정받지 못한다. 성소수자에게 관용적이지 못한 사회에서 퀴어 당사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호명한다 한들 돌아오는 건 인정이나 환대가 아니라 차별과 멸시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을 정체화하는 것은 일상의 층위에서건 사회의 층위에서건 투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해서 무한한 안정을 얻을 수 있을까. 같은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은 정말 동일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홍대에서 술을 마시는 대학생과 댓거리에서 술을 마시는 대학생은 청년이라는 호명 아래 단일해질 수 있나. 정체성은 유사한 특징을 지닌 이들을 언어로써 모아주지만, 동시에 단순화하기도 한다. 견고한 줄 알았던 단어의 울타리 안에서 차이라는 틈새를 발견하는 일은 때때로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을 만들어 낸다.
정체성과 언어란 애초에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외려 가졌다고 믿어야 하는 영역에 가까울 것이다. 그 믿음이 흠 없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우리 도처에 깔린 소외란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다. 하지만 우린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잔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서로에게 지극히 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은 이런 한계를 뜻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소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침잠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공동의 무언가를 재건할 수도 있겠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는 오롯이 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생기는 외로움. 동일성에 지나친 낙관을 불어 넣는 것은 더 큰 실망감만을 안기겠지만, 모두가 본질적으로 외롭다는 사실 하나만큼 은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느슨한 공통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