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이란 무슨 의미일까. 동아리 선배와 댓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가던 길에 돌봄노동자 지원센터 건물을 본 기억이 있다. 돌봄이 뭐냐고 묻는 내게 선배는 노인이나 환자를 간병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끄덕이고는 있었지만, 잘 이해하진 못했다. 그렇게 짧은 설명으로 맺을 수 있는 단어인가. 정확히는 몰라도, 더 복잡한 단어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과 함께 찜찜한 마음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선거 공보물을 들여다봤다. 돌봄 책임 강화, 돌봄 국가 건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적혀 있는 돌봄 공약이 눈에 밟혔다. 아무래도 돌봄은 더 이상 진보정당만의 구호가 아닌 것 같았다. 돌봄을 이 나라의 정책적 유행어나 과제라 여겨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해 봤다. 하지만 만족할 만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닌데, 돌봄은 그게 아닌데.
돌봄이라는 기표가 주는 막연함이 집착을 불렀던 걸까. 돌봄에 관한 책을 읽어봤다. 더 케어 컬렉티브의 『돌봄 선언』에 따르면, 돌봄은 직접적인 돌봄 노동뿐만 아니라 타자와 생태에 관여하고 염려하며 함께 책임지는 것까지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명쾌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원칙 아래 공동체적 결속이 붕괴됐다는 문제의식은 날카로웠다. 이제 돌봄은 무관심한 세상에서 사라졌던 친밀성을 복원하는 유용한 실천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에 살은 조금 붙었을지언정, 여전히 돌봄은 그게 아니었다. 이쯤 되니 돌봄이라는 단어가 막연한 건지 내 감각이 막연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가늠이 되기 시작한 순간은 의외로 직접 누군가를 돌봐야 할 때였다. 옥상에 올라와 있다는 SNS 게시글을 업로드한 후배를 붙잡으려고 고운관 계단을 뛰어 올라갈 때, 통증에 몸부림치는 동거인의 손을 곁에서 하염없이 만질 때, 스토커에게 협박당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가족의 등을 토닥일 때. 일단 해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어떨 때는 그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상대의 고통을 응시하며 안절부절못했던 순간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고통스러워한 순간들, 이 모든 것을 감내해 내었더라도 그것이 꼭 성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돌봄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고통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적지만, 여전히 돌봄은 무정한 세상 속에서 친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곁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버팀돌이다. 돌봄은 이제 일부 개인이나 본질적 여성성에 대해 추측하는 도덕주의자들만이 몰두하는 주제가 아니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찬사에 조금 현실적인 부연을 추가해야 하겠지만.
외려 돌봄이 낙관적이리라는 예상을 끌어내리고서야 그 개념이 내 일상과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돌보다라는 뜻의 옛 영어 ‘caru’에는 보살핌, 걱정이라는 의미 외에도 슬픔, 애통, 괴로움이 포함되어 있다. 애초에 돌봄이 꼭 아름답지는 않다는 것, 도리어 가장 추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직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