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가 점차 사라지며 3월을 맞이했다. 3월의 가장 첫날인 삼일절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날이다. 삼일절은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전 세계에 알린 데 의미를 가진다. 우리 대학이 위치한 마산에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옛 역사를 돌아보며 일제에 맞섰던 선조들의 희생을 알고, 삼일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후손들에게 역사 체험 및 교육을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구 마산헌병 분견대 전시관에 대해 알아보자. / 문화부
구 마산헌병 분견대는 현재 국내에 위치해 있는 유일한 일제강점기 헌병대 건물이다. 2005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며 문화재로 활용하기 위해 전시관을 조성하여 2019년 11월 26일에 개관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축물로서 권위적인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건물 그대로 건축사적,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전시관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 과정과 무단통치 시기 일본헌병의 잔악상 및 그 과정에서 마산헌병 분견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생히 볼 수 있다.
구 마산헌병 분견대란?
일제강점기 시대에 마산에 주둔했던 일본 헌병대의 분견대가 사용했던 건물인 마산헌병 분견대는 1926년에 건립되었다. 많은 지역 중에서도 구 마산에 분견대 건물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에는 일력과 물자는 주로 배를 통해 이동했다. 일본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를 거쳐 한반도에 먼저 닿을 수 있는 항구가 마산항이었다. 이렇듯 일본은 선점하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춘 구 마산에 분견대를 세워 한반도를 강점하고자 했다. 그렇게 마산헌병 분견대가 세워지며 본격적인 억압과 수탈이 시작되었다.
마산 주민들의 기억 속에 헌병 분견대는 마산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작은 정부’로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헌병은 순사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민간 영역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는 식민 지배 기구였다. 더군다나 마산이 군사지역이 되면서 일본군 군사시설 설치를 위해 주민들의 생활 터전도 강제로 수용되었다. 마산의 9만 1천여평은 군사시설을 지원하는 수도용지로 수용되었고, 9천여 평의 부지가 일본군 병영부지로 사용되었다. 이에 주민들의 저항운동을 벌였지만, 마산에 주둔한 헌병대가 이를 탄압했다. 그렇다보니 주민들의 일상 또한 통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아픔이 남아있는 곳
구 마산헌병 분견대 전시관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3가 11에 위치한다. 우리 대학 정문에서 도보로 약 10분 소요되며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매주 월요일, 신정, 설·추석 당일에는 휴관한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따로 입장료 없이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건물의 외부는 붉은 벽돌과 외벽에 돌림띠 장식, 긴 창을 낸 모습으로 전형적인 일제강점기의 건물 형태를 띤다. 전시관은 헌병 분견대실, 민족탄압실, 고문실, 취조실, 사진 자료실, 영상실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영상실에서는 일제강점기 사진과 설명이 들어간 영상을 구비된 의자에 앉아 편하게 관람 할 수 있다. 영상실 옆에는 헌병 분견대실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는 일본군 헌병대 파견부터 마산헌병 분견대의 기록을 상세하게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실제로 마산에 헌병이 배치되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공간이다.
민족탄압실에서는 일제가 어떻게 독립투사를 관리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그들이 작성한 마산지역 출신 독립투사들의 신상 카드를 볼 수 있다. 더불어 도로명으로 남은 마산의 항일 운동가, 공포의 분견대로, 일제헌병의 민족탄압이 담긴 사진 등을 관람 가능하다. 민족탄압실 안쪽에는 고문실이 자리 잡았다. 고문실 앞에는 창원지역의 항일 운동가인 괴암 김주석 선생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당시 김주석 선생이 겪은 고문의 기록을 통해 대한독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했음을 몸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안쪽에 ‘사형수 및 고문체험’이 마련되어 있다. 체험실은 성인 한 사람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의 작은 크기의 공간으로, 고문을 받았던 우리 선조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전시실 가장 안쪽에는 지하고문실을 재현한 공간이 마련됐다. 주리틀기, 물고문 등 당시 우리 선조들이 겪었던 고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마산의 항일 독립운동
현재 마산헌병 분견대가 위치한 마산은 항일운동이 거세게 진행 되었던 곳이다. 무단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선조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현재까지도 마산에서는 대한독립을 위해 힘썼던 항일 운동가들을 추모하고 과거의 아픈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노력 하고 있다.
당시 마산에서는 일제의 수탈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일 민족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1910년대에는 민족 교육과 3·1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무단통치를 거부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과시했다. 1920년대에는 문화 운동과 청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며 전국적 민족 운동단체인 신간회로 항일 운동의 역량이 모였다. 일제의 폭압이 거세지던 1930년대 이후에도 노동 운동, 신사참배 거부 운동, 비밀결사 운동 등이 해방될 때까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우리 지역을 위해 맞서 싸운 이들을 기리기 위해 몇몇 도로명은 항일 독립운동과 연관을 가진다. 대표적으로 마산합포구 진전면 죽헌로가 있는데, 죽헌 이교재 선생의 호를 따라 지어진 곳이다. 죽헌 이교재 선생은 24세가 되던 해에 경술국치를 계기로 구국의 일념을 품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3·1운동에 지방의 선도자로 활동하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에도 임시정부의 임무를 받아 활동하며 고학생들과 ‘칼톱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후에는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임시정부로 보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헌병대의 집요한 감시로 다시금 마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극열항일투사로 분류되어 부산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하며 6년간 옥고를 치렀다. 끝내 고문의 여독으로 1933년 음력 1월 20일 향년 47세로 옥중 순국했다.
광복 뒤에는 지역 유지의 협찬과 학생들의 성금으로 현재 마산시 진전면 임곡리 묘소로 위치를 옮겼고 묘비를 세웠다. 이교재 선생의 항일투쟁은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제208호)을 추서 받아 국가로부터 공적을 공식 인정받았다. 그리고 마산시는 이교재 선생의 희생과 정신을 기르기 위해 선생의 묘소에 이르는 길을 죽헌로로 명명하여 민족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이를 다시 겪지 않으려는 출발선이다. 대한독립을 목이 메도록 불렀던 선조들의 희생은 결코 잊혀서는 안 된다. 3·1절을 집에서 여유롭게 지내며 즐기는 잠깐의 휴식도 좋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힘쓴 선조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마음으로 ‘구 마산헌병 분견대 전시관에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