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평온한 대지 아래 잠든 불안한 영혼들
[내 인생의 책] 평온한 대지 아래 잠든 불안한 영혼들
  • 언론출판원
  • 승인 2022.03.0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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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저
『폭풍의 언덕』,에밀리 브론테 저

  몇 년 전부터 비우고 살기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는 매우 과감한 편이라 추억이 깃든 물건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대학시절부터 읽어온 책들은 한 달에 한 권 버리기도 쉽지 않다. 사람 사이의 인연만큼이나 책과의 인연 역시 추억의 끈이기 때문이다. 이별할 책을 고르고 골라 책을 열면 끄적거려둔 글씨 때문에 도로 제자리에 놓기 일쑤이다. 그래서 책장 하나는 끝까지 남겨둘 책들만을 위한 특별 공간이 되었다.

  그 책장 앞에서 가끔 펼쳐보는 책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원작 제목 『워더링 하이츠 Wuthering Heights』)이다. 제목부터 낭만적인 이 작품을 언제 처음 읽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번역본과 영화화된 것까지 보았지만 이 작품이 ‘내 인생의 책’이 된 건 원작을 처음 읽었을 때다. 제목의 뜻이 ‘폭풍의 언덕’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놀라움도 있었지만, 광기어린 사랑의 극치를 담아낸 언어의 마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대체 사랑의 심연을 어디까지 들여다 보았길래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 놀라웠다. 이 책을 읽으려고 긴 세월 영어 공부를 한 건 아니었지만, 영어에 쏟은 그간의 시간을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아름답고 콧대 높고 자기중심적인 여성, 캐서린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외지에서 데려온 고아 히스클리프와 함께 커가며 사랑에 빠진다. 이기적인 그녀는 이웃 마을의 교양있는 부잣집 청년과 결혼하면서도 히스클리프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역시 그녀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과 집착과 복수에 영혼을 팔고 그녀 주위를 배회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가 자신과 똑같은 영혼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며 “그는 나보다 더 나 자신이야(He’s more myself than I am.)”라고 말한다. 히스클리프 역시 훗날 캐서린이 딸을 낳고 죽던 날 밤, 그녀의 집 밖에 밤새 지키고 서 있다가 새벽녘 하녀를 붙들고 묻는다. 죽어가던 캐서린이 자기 이름을 입에 올렸는지를. 그러나 차마 그 이름 ‘캐서린’을 말하지 못하고 ‘그녀(she)’라고만 되뇌인다.

  얼핏 보아 나쁜 여자와 나쁜 남자의 사랑 이야기인 이 소설은, 우리가 무엇인가에 인생을 건다는 것의 처절함을 곱씹게 해준다. “저토록 평온한 대지 아래 저토록 불안한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 나란히 묻혀있지만 끝내 맺어지지 못한 그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를 만난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책장을 덮을 때쯤, 나는 무엇에 인생을 걸어본 적이 있나 자문하게 된다. ‘내 인생의 책’은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자주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첫 손에 꼽을 책은 『폭풍의 언덕』이다.

이미선(영어교육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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