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입학했던 그 해는 남쪽 지방인 고향 마을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그런 날엔 온 가족이 대빗자루 몽땅 빗자루 등 모든 도구들을 꺼내어 제설 작업을 하였다. 대학 입학이 결정되어 있던 나는 입학 때까지 고향 집에 머무르며 소일거리를 했고, 아랫집에 살았던 친구는 공부를 잘했음에도 가정 형편상 진학을 포기하고 바로 삶의 현장으로 갔었다. 그땐 그랬었다.
입학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그 친구는 나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자기의 여자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하얀 피부와 예쁘장한 얼굴의 세련된 도회풍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첫눈에 ‘괜찮은 친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학 후 사범대학 소속인 그녀와 법정대학 소속인 나는 거의 매일 만났다. 하숙을 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자기 집에서 몇 킬로나 되는 길을 통학을 했다. 수업이 끝나면 그녀 집으로 가는 철길을 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며 걷곤 했다. 어느 순간 나는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호감에서 좋아하는 것으로 변해있는 것을 느끼며 당혹해 했다.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내적갈등이 깊어졌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번은 대학 중앙도서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도서관 내 특정 장소를 지정하지 않고 약속을 잡아 서로 찾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다음 날 다투기도 하였다. 신입생이라 학내 상황을 잘 몰랐고 휴대폰이 없던 시절의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 시절 청춘들이 그러하듯 학교 앞 음악다방과 분식집에도 자주 갔었다. 그렇게 매일 보아도 행복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대학가의 봄 축제가 시작될 무렵 나는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그녀는, 친구는 사랑이고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친구와 나의 차이를 에둘러 표현했다. 친구도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알았는지 셋이서 만난 어느 날 친구와 나는 크게 다투었고 그녀는 중간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집으로 오는 길 눈물이 났다. 이제는 그녀를 잊겠노라 다짐했고 그렇게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정리할 무렵 돌연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1년 후 군 입대를 했다.
제대 후 복학하여 학교로 가는 버스에서 실로 몇 년 만에 우연히 우린 조우했다. 그녀는 서울 생활이 맞지 않아 다시 내려 왔다고 했고 우리가 다녔던 학교 앞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친구와도 헤어진 상태라고 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녀를 다시 이성으로 만나기로 하고 그녀가 일하는 곳을 찾아갔는데 그녀는 이미 그 곳을 그만 둔 후였다. 연락처도 알 수 없었고 이후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 후 친구한테서 그녀의 가족들 전부 서울로 이사를 했다고 전해 들었을 뿐.
직장을 다니면서 서울로 출장을 갈 때는 혹 어디선가 그녀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아니 만났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한 적도 있었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이 있어서 서울에 다녀오면서도 그 생각을 붙잡고 있었던 나였다. 이젠 50대 중반의 여인이 되어 있을 내 젊은 날의 그녀를 추억해 보았다.
여러분들도 저처럼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소중하게 떠올려 볼 러브스토리 한 페이지를 만들고 계신가요?
이즈음 나의 대학 생활을 반추 해보면 군 전역 후 2년간 고시원에서 같은 목표를 가진 학우들과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고 또 함께 고민했던 순간순간들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그때의 학우들이 고시합격 등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성공의 요인은 늘 한결같은 방향의 꾸준함이란 생각이 든다. 고맙다.
지금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나는 매번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임을 되내인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지고 긍정적인 상태를 유지하여 좋은 일이 뒤따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좌우명은 ‘부드러운 미소와 환한 웃음으로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되자’ 이다. 미소와 웃음에는 신뢰와 호감과 자신감이 따른다는 믿음으로 매일 아침 거울 앞에 서서 미소를 지어보자. 그리고 신나게 하루를 시작 해보자.
조창환(법학과 졸업 동문, 공인중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