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지만은 않았던, 1980년 5월의 봄이 돌아오다
찬란하지만은 않았던, 1980년 5월의 봄이 돌아오다
  • 성유진 기자
  • 승인 2018.05.1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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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사장에게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보낸 글이다. 이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로 5·18민주화 운동이다.

  1979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중심인 신군부(1963년 전두환, 노태우 등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결성한 비공식 사조직) 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민주주의가 신군부의 집권 때문에 후퇴하고 억압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의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에 절정에 이르러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왜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장 크게 발생하였나요?

  5·18 운동을 생각하게 되면 광주 지역을 떠오른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였다. 5월 14,15일 서울에 모인 전국 27개 대학 학생 대표들은 서울역에 모인 10만 명에 육박하는 학생을 이끌며 시위를 시작하였고, 지방 24개 대학의 학생들이 각 지역에서 가두시위를 감행하며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연좌 농성을 벌이며 신군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이면서도, 군과 충돌은 현명치 않다는 판단에 정치 일정을 관망하고자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하지만 대중 매체는 외부의 억압으로 통제했었기 때문에 지방은 소식이 늦게 전해졌다. 시위를 한 후 '만약 학생들이 잡혀가면 학교에서 다시 모여서 시위를 하자' 라고 약속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다음날 새벽 광주 학생들은 시위를 시작하나 전두환이 전국에 계엄령을 내리는 바람에 다른 곳에선 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하얀 속옷이 까맣게 되도록 고문당하다

  약속한 대로 학생들은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학생들의 해산을 설득하다 첫 충돌이 발생하였다.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도심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이 자행한 만행을 알렸다. 전두환 세력은 이러한 광주 시민들의 항쟁을 폭도와 간첩으로 규정짓고 공수 대원을 투입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육체적, 정신적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물 먹이기 등 끔찍한 고문을 시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 갔다. 계엄군은 계속 늘어났고 발포까지 이루어지는 등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이 과정에서 5·18민주화 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일원으로 확대되었다.

*지금, 가해자들은 충분한 죗값을 받았는가

  전두환·노태우 등 38명을 군사반란 혐의로 고소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관련자들도 이들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쉽게 이들에 대한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군사 반란은 맞지만 혼란이 예상되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1994년 검찰은 이 사건을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밝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5년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고 검찰은 재수사에 나섰다. 1996년 1월 전두환, 노태우 등은 5·18 민주화 운동의 폭력 진압 혐의로, 2월엔 12·12 사태 반란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후 1심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고등법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으로 감경됐다. 대법원도 전두환, 노태우 등의 반란죄를 인정했다. 결국 1997년 당선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는 김영삼 대통령과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을 특별 사면했다.

  때문에 그들은 아직까지 두 눈을 뜬 채 멀쩡하게 지내고 있다. 대학생인 우리가 이 역사를 잊게 되면, 또다시 이러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무고한 생명을 희생해야만 했던 광주 시민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5월 18일이 돌아온다.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마냥 찬란하지는 않았던 봄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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