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의거를 돌아보다
3·15의거를 돌아보다
  • 이강민 기자
  • 승인 2021.03.1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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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의거가 있었다. 부마 항쟁이 있었다. 학생들의 저항. 시민들의 분노. 그 사이에 우리 대학도 함께했다. 마산은 민주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다. 지금도 마산 사람들의 가슴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 마산이 일어 나면 정권이 바뀐다. 2021년 봄에 3·15를 돌아보았다. / 대학부

  1960년 봄, 한 청년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독재에 맞선 김주열 열사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어떤 이는 총탄에 쓰러졌고 어떤 이는 경찰에게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민주화의 불을 지펴냈다. 우리는 3·15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3·15의거탑 과거와 현재                                                                             / 자료 출처: 3·15의거기념사업회

 

- 사람들의 분노가 쌓여가다

  3·15의거는 부정 선거로 인해 사람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들고 일어섰던 민주화 운동이다. 2차에 걸친 의거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고 의거는 혁명으로 이어졌다. 3·15선거, 대통령도 아닌 부통령선거가 마산 사람들에게 특히나 중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부정선거 이전, 당시 정치권을 향한 시민들의 불만은 늘고 있었다. 큰 항구였던 마산은 해방 이후 귀국한 사람과 일자리를 찾으러 농촌에서 떠나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미국의 원조 물품이 국산 농산물의 경쟁력을 약화시켜 일자리를 뺏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도시로 나오면 일자리가 많았지만,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사회적·경제적 문제가 발생했다. 마산으로 이주한 이주민뿐만 아니라 마산 시민의 생계까지 위협을 받았지만, 정치권은 정권에만 집착했다. 민생 안정은 손을 놓은 채 세월은 흘렀고, 그렇게 마산은 호황을 누리던 도시에서, 먹고살기 힘든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허윤수 민주당 후보의 변절 사건도 마산 시민의 분노를 더하는 데 일조했다. 자유당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마산 시민들은 민주당 허윤수 후보를 지지했고, 후보는 이에 마산 경제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허윤수 후보는 자유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유당 공천과 동양주정의 경영권을 약속받고 1960년 자유당에 입당했다. 힘겹게 하루를 버티던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여전히 민생 안정에는 신경을 끄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정치권의 모습에 분노했다.

 

- 독재 정권, 정권 유지를 바라다

  자유당과 이승만은 계속해서 권력을 원하고 있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여러 대책이 필요했다. 대통령 횟수에 제한이 있던 헌법을 고쳐야 했고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야 했다.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이 고령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며 이승만의 연임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계승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 헌법을 뜯어고침과 동시에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등 언론과 야당을 탄압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3대 민의원 선거에서 22석이던 무소속을 제외한 야당 의석이 1958년 80석으로 늘어났다. 물론 자유당이 127석, 50% 이상을 가져갔지만, 야당의 동의 없이는 개헌할 수 없게 되었다. 자유당의 정권 유지를 위해선 이승만과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당선이 모두 필요했다.

 

- 독재 정권, 부정 선거로 영구집권을 계획하다

  직전 민의원 선거에서 여론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를 준비한다. 대통령 및 부통령선거 1년 전부터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투입하거나 야당 의원들을 회유했다. 정치깡패 등을 동원하여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했으며, 민주당 당원의 집을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투표 과정에서 부정도 만만치 않았다. 투표장에 도착하니 이미 선거인 명부에 지장이 찍혀있는 예도 있었고 3·5·9인조 투표로 서로를 감시해 모두가 여당 후보를 찍도록 했다. 혹여나 무리를 이탈해 단독 행동을 할 시에 가차 없이 폭행을 가했다.

  선거가 부정한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알게 된 사람들은 선거를 포기하고 부정 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물세례를 퍼부었지만, 진압이 쉽지 않자 총구를 겨눴다. 이것이 제 1차 3·15의거다.

 

- 4월 11일, 항거의 불씨가 살아나 퍼져나가다

  1차 3·15의거 이후 많은 시위가 마산 지역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경찰의 가차 없는 진압 앞에 시위 분위기는 수그러들었다. 최루탄과 총격도 있었고 시위 참여자에 대해 폭력적인 고문도 이어졌다. 그와 함께 정권은 공산당의 소행이라는 거짓 정보로 사실을 숨겼다.

  불씨가 꺼져가나 싶던 그 순간, 한 청년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1차 의거 이후 실종되었던 김주열 열사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분노했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앞에 분노에 찬 마산 시민과 학생들 수천 명이 모였다. 마산고를 비롯한 8개 고등학교 학생을 주축으로 시민들이 합류하며 온 마산이 들고 일어섰다. 2차 의거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인대학 장덕수 경영학회장이 작성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                / 자료 출처: 3·15의거기념사업회

- 해인대학, 우리 선배들 이야기

  “첫째, 우리는 비폭력주의로 대항한다. 둘째,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투쟁한다. 셋째, 우리는 무저항주의로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물러갈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 당시 해인대학이었던 우리 대학 선배들의 선언이다.

  1960년의 민주화 흐름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4·19 당일 시위와 그 시발점이 된 우리 대학 선배들의 평화 시위다. “해인대(현 경남대) 학생들의 시위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잊혀져 있어 매우 안타깝습니다.” 김정대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한 해인대학의 선언문이 지성인다우면서 매우 강렬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사건을 평가했다.

 

  학우들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체로 3·15의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같은 상황이라면 직접 시위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답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답도 있었다.

  “마산 사람이 아니거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지 않을까요?” A 학우는 해인대학에 관해서도 알고 있고 3·15 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른 학우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는 확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은 선뜻 행동으로 나서지 못했을 것 같다거나 부당하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시위에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며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학우도 있었다. 다른 생각을 가진 학우들도 많겠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답변은 아닐까. 2021년 봄에 3·15를 돌아보았다.

이강민 기자 cros95@naver.com
정유정 기자 youjung02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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