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고 싶은 할머니
다시 만나고 싶은 할머니
  • 언론출판원
  • 승인 2020.05.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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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몇 년만 지내다가 부모님과 살기로 했지만 공부하는 환경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루다 보니 어느새 1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주변 사람들이 늘 내게 하는 질문 중 하나는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좋다는 말로 대답을 하곤 했다. 그렇게 답할 만큼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부모님과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을 원망했지만 자라고 보니 오히려 감사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아낌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좋은 분들을 만났고 또한 동네에서 평생 잊지 못할 만큼 큰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셨던 할머니께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얼마 후 동네에서 잘한다는 병원에 가니 큰 대학 병원을 가보라고 하셨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었던 건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학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들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우리 가족 모두는 별일 없을 거라며 병원으로 갔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고모의 표정이 아주 슬퍼 보였다. 나는 바로 할머니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고 눈앞에 계속 눈물이 차올라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는 할머니의 모습 때문에 울고 싶은 걸 참아보려고 했지만, 자꾸 목이 턱턱 막혀와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는 바로 항암 치료를 시작하겠지만 이미 전이가 많이 된 터라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렇게 길고 긴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치료가 끝이 나서 언제쯤이면 다시 건강한 생활을 하실 수 있을까. 그날을 꿈꾸며 우리 가족은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계속된 항암 치료로 할머니의 모습은 점점 변해갔다. 항상 염색으로 단정하게 손질했던 흰머리를 더 이상 가릴 수 없게 됐고, 머리카락은 계속 빠졌다. 게다가 입맛이 없으셔서 매일 한 그릇 뚝딱하시던 밥도 몇 숟갈 뜨고선 내리기 일쑤였다. 겨우 몇 숟갈 하신 것마저도 소화를 못 해 변기 한가득 갈색의 토를 하셨다. 평소에 잘만 찾던 변기를 찾지 못하셨고, 전기매트의 코드를 찾지 못해 한동안 멈춰계셨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다. 누구의 도움 없이 무슨 일이든 잘 하셨던 할머니가 왜 이렇게 됐을까 싶었다. 하루는 할머니께서 몸에 음식물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게 되어 나트륨이 부족해 잠시 정신을 놓아버렸을 때가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눈물만 펑펑 쏟으며, 삼촌과 급하게 응급실로 갔다. 가는 순간에도 하늘이 무심하기만 했다. 간호사가 할머니께 여러 가지 질문을 하는데 거듭 대답하는 건 내 이름뿐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할머니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한 번 더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길고 긴 항암 치료는 2018년 6월 25일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할머니가 떠나시기 전날인 24일에 할머니를 뵈려고 병원에 갔을 때 이상하게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고3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그 마음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와 공부를 했다. 밤 11시가 넘어 2층 내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편한 옷 말고 예쁜 옷으로 입으라는 말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내 불안한 마음은 역시 틀리지 않았고,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러 갔다. 급격하게 상태가 나빠져 중환자실에 계셨던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땐 이미 의식은 없었고, 기계 하나에 의지해 간신히 쉬고 있는 할머니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할머니 모습이 생생하다. 이젠 정말 할머니를 보내줘야 한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많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후 하나님 곁으로 보내드렸다.

  할머니를 진짜로 보내드리는 날엔 하늘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다. 내 마음에도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더 슬펐다. 할머니께서 안 계신 처음 몇 달간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 생각에 밤마다 울며 잠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은 링거를 맞아야 할 만큼 몸이 정말 아팠다. 할머니 없이 그렇게 아파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할머니 생각에 이유 없이 서글펐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할머니께서 항상 마중 나와 계셨던 곳에서 할머니의 모습을 봤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집 대문을 열자마자 할머니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잃고 난 후 모든 것이 그대론데 왜 너만 없냐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게 된 날이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사람에게 4번의 생이 있다고 하던데 언젠가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받은 사랑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돌려드리고 싶다.

김미지(사회학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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