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3·15 청년 문학상 현상 공모 - 단편소설 당선작 '어쨌든 우리는 달려가고 있으므로'
제1회 3·15 청년 문학상 현상 공모 - 단편소설 당선작 '어쨌든 우리는 달려가고 있으므로'
  • 언론출판원
  • 승인 2020.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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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 당선: 김유진(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4)

 

어쨌든 우리는 달려가고 있으므로

  1.
  빙판길에서 넘어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종종걸음으로 걷는 게 좋습니다.
  숫자가 다 벗겨진 리모컨 버튼을 엄지로 문지르며 나는 미친놈들, 하고 중얼거렸다. 미친놈들이라고 생각했다. 미친놈들. 종종 걸으라고? 미친놈들. 뉴스에서는 특히 노인들이 빙판길 찰과상으로 인해 응급실을 찾는 일이 지난달보다 14.8 퍼센트 늘었으니,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빙판길을 걸을 때 종종걸음으로 걷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빙판길에서 종종 걸어보는 기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화면에 호박색 넥타이를 맨 아나운서의 상체가 꽉 들어찼다. 차라리 걷지를 말라고 해라, 미친놈들. 여섯 번째 미친놈들, 하려는데 전화가 왔다. 공 피디였다.
  뭐하고 있어요?
  저 그냥 있죠. 무슨 일이세요?
  윤정 씨, 내일 강릉 가죠?
  네.
  잘 다녀오시구요. 예진 씨한테 언뜻 들은 건데, 호박 알레르기 있다면서요?
  아, 네.
  알레르기가 심한 건 아닌가 봐요? 미리 알았으면 다른 분 시키면 됐는데.
  네에.
  자동응답기처럼 네, 한 단어를 여러 박자로 바꾸어 대답하는 나에 반해 공 피디는 다양한 어조로, 혹시 정 못 먹겠으면 포장을 해오라는 둥, 배달이 된다고 그러면 방송국으로 배달을 시키라는 둥 말을 늘어놨다. 티브이에선 어느새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오른쪽 상단에 <궁금한 이야기 Y>의 프로그램 로고가 떠있었다.
  윤정 씨, 우리 프로그램 하나 또 같이할까요? 이번엔 미스터리 시사 교양 쪽. 윤정 씨 메인하고. 어때요? 제목은 궁금한 이야기들 더블유 에이치 와이.
  궁금한 이야기들 더블유 에이치 와이요?
  왜 저러고 사나, 싶은 사람들. 어떻게 저러고도 산다 싶은 사람들 많잖아요. 우리가 그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추적하고 그러는 거죠. 잘하면 토요일 밤에 편성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메일로 기획서 보내놨으니까 확인해 봐요. 내가 썼어요. 이번엔 좀 기똥 차요.
  공 피디는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제안이 있으면 메일로 답장을 하라고 말한 뒤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한 시간 전에 메일함을 확인했음에도 벌써 네 통이나 쌓여있었다. 지마켓 홍보 메일, 씨제이이앤엠에서 온 휴면계정 정리 메일, 암보험 가입권유 메일. 가장 위쪽, ‘제목 없음’을 제목으로 단 공 피디의 메일에는 내용도 없이 한글 첨부파일 하나만 담겨있었는데, 들었던 대로 <궁금한 이야기들 w.h.y.>의 기획안이었다.
  궁금한, 이야기들, 더블유, 에이치, 와이. 제목을 반복해서 소리 내어 발음했다. 눈으로는 기획안을 읽었다. 궁금한, 이야기들, 더블유, 에이치, 와이. 궁금한, 이야기들, 더블유, 에이치, 와이. 궁금한,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이 미친놈. 나는 휴대폰을 끄고 이마에 갖다 댄 뒤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왜 자꾸 나한테만 이 미친놈이. 왜 또 나한테. 왜 또 나를 데리고. 휴대폰을 이마에 몇 번이고 두드렸다. 여기, 한 여자가 있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했는지 스토리텔러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슬쩍 눈을 옆으로 돌려 티브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한 여자가 있습니다.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높은 의자에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닌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2.
  아침 일곱 시에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해, 아홉 시 오십 분에 강릉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23아9810 버스엔, 기사를 포함해 총 다섯 명만이 탑승 예정이었다. 어제 예매를 하러 들어갔을 때에는, 중앙자리에만 승객 세 명이 모두 몰려있었는데, 그러면 중앙 자리가 좋은 건가 싶어 가장 앞자리에 앉으려다 16번을 골랐다.
  출발 시각보다 13분 먼저 도착했을 땐 버스 안이 텅 비어있었다. 출발이 임박해오는 시간임에도 버스가 텅 빈 건 처음 본 광경이라, 도로 내려서 버스 앞머리에 달린 엘이디 전광판을 확인했다. 서울-강릉행 우등버스는 이 시간에 23아9810 버스뿐이었다. 문득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본 인터넷 뉴스가 떠올랐다. 버스 운전기사를 하는 경기 시흥 쉰넷 한 모 씨가 오늘 아침 사체로 발견됐다는 뉴스였다. 23아9810 버스의 기사가 경기 시흥 쉰넷 한 모 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버스 회사에 비상이 걸렸고, 대체 기사를 찾느라 기사의 출근이 늦어지는 걸 수도.
  ‘강릉행 고속버스, 시흥에서 멈추다’. ‘시흥의 엔진, 그에겐 무슨 일이’. 사건에 맞는 궁금한 이야기 더블유에이치와이용 제목을 고민하다가 그만 두고 16번 자리를 찾아 가는데, 거기에는 노파가 앉아있었다. 누런 양털조끼에 안에는 희멀건 와이셔츠를 입고 손가락장갑을 꼈다.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는 옆모습에 난 베개자국이 선명했다. 마름모꼴로 박음질 된 베개를 베시는구나, 생각하며 앱을 다시 확인했다. 나의 자리는 16번이 맞았다.
  저, 선생님.
  깨어난 이후 처음 나온 목소리는 칼칼했다. 정확히 발음됐다기보다는 가래 끓는 소리로 뭉뚱그려져서, 목을 몇 번 가다듬고 말했다.
  선생님.
  이번에는 전혀 갈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선생님은 돌아보지 않았다. 선생님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선생님이 이쪽을 돌아봤다.
  예?
  혹시 자리가 몇 번이세요?
  자리요?
  네.
  자리는 왜요?
  선생님께서 자리를,
  착각한 것 같아서요. 잘못 안 것 같아서요. 틀리게 앉은 것 같아서요.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어떤 말로 지적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먼저 말했다.
  웁스, 내가 자리를 등신같이 앉았구나?
  네?
  내가 자리를 등신같이 앉았나 보네. 그렇죠?
  아뇨, 그럴 수도 있는데,
  내가, 어디 보자. 식스틴인데. 여기가 식스틴이 아닌가?
  선생님이 조끼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냈다. 저렇게까지 내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티켓을 저 아래까지 쭉 내리더니, 고개를 뒤로 빼 티켓을 내려다보고는 웁스, 했다.
  식스틴이 아니라 세븐틴.
  선생님은 세븐틴, 세븐틴 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떼곤 왼쪽으로 두 걸음 가더니 17번 좌석에 앉았다. 이윽고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하우 어바웃 유?
  전…….
  마른침이 꿀떡 넘어갔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잠시 고민하다가 대꾸했다.
  식스틴.
  선생님이 무릎을 모으고 옆으로 비켰다. 나는 땡큐, 하며 게걸음으로 선생님을 지나 16번 좌석에 앉았다.
  앉고 나서야 가방을 짐칸에 올리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다시 일어나 게걸음으로 선생님을 지나치려면 익스 큐즈 미, 해야 하는 걸까. 걱정하며 옆을 보았을 때 모자를 거꾸로 뒤집어쓴 남학생이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18번에 앉았다. 선생님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3.
  18번 남학생의 이어폰에서 드럼 소리가 삐져나왔다. 얼마나 큰 소리면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나 싶으면서도, 소음 같은 음악을 들으며 자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피곤하겠지 싶었다.
  한마디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잠깐 졸고 난 뒤였다. 그 잠깐의 사이에 나는 꿈을 꿨고, 꿈속에서는 다갈색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공 피디가 드럼을 쳤다. 공 피디는 행복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멜로디를 붙이는 다른 악기라곤 아무것도 없이 그저 드럼 소리만 들렸다. 묵직한 소리가 내 얼굴을 자꾸만 때렸다. 팔뚝으로 얼굴 앞을 막고 몸을 웅크렸다.
  눈을 번쩍 떴을 때 나는 앉은 상태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이건 아니지, 라고 생각했다. 참느라고 이런 꿈을 꿀 일은 아니다. 내가 왜 지금 이 순간에마저 공 피디가 드럼 칠 줄 안다고 말한 적 있었는지, 공 피디가 탈모였는지, 혹은 모발상태는 양호하나 스스로 머리를 민 것인지에 대해 되짚어야 하는가. 멀찍이서 여전히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18번 학생의 얼굴이 더욱 잘 보이는 데에 반해 무릎 위의 가방은 내 배를 꾸욱 눌렀다. 옆 주머니에 넣어뒀던 삼다수 500 밀리리터 페트의 뚜껑이 특히 내 배꼽을 안쪽으로 깊숙이 눌렀는데, 갑자기 장이 부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휴게소에 들를지 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장을 자극하는 건 영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 같아, 가방 위치를 돌려놓고 말을 걸어야겠다 싶어 다시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저…….
  가방 아랫부분을 잡아 올리는 중에 그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막 안전벨트를 풀었는지 의자 아래로 가벼운 쇳덩이가 망가진 괘종시계 추처럼 엇박자로 덜렁거렸다.
  여러분.
  선생님은 앞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도하는 목사이거나 부처의 말씀을 나누는 스님 정도가 아니고서야 나오지 못할 법한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무거운 가방을 어중간한 상태로 들고서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대각선의 21번 아저씨와 15번 여자가 선생님을 힐끗대는 게 보였다.
  여러분, 저한테요. 총이 있어요.
  선생님은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말한 뒤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머쓱한지 홋홋 웃었다. 나는 그렇구나, 하면서 배를 문질렀다. 선생님께는 총이 있구나. 선생님께 총이 있어 봐야 얼마나 대단한 총이라고. 선생님께 총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것보다 얼른 저 18번 학생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나는 선생님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대신 그 너머에서 자고 있는 18번 학생을 봤다.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드럼 소리가 뚝 멎었다.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인가보다.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바로 세운 가방을 끌어안고 몸을 앞으로 숙이려는데, 동시에 선생님이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 들었다. 그걸 머리 위로 올리더니 흔들었다. 시커멓고 딱딱한 쇳덩이가 허공에서 쇳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초, 초, 총.
  너머에 있는 21번 아저씨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고서 선생님의 손끝을 바라봤다.
  네, 이건 총이구요. 그리구요, 저는 이제 테러를 할 거예요.
  선생님은 그러면서 총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4.
  선생님께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요구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되, 재미가 없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나는 그 조건을 듣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했다. 뺨에 베개자국을 달고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시간 맞춰 아침 일곱 시 버스에 올라탔다니. 이 얼마나 부지런한 테러범이란 말인가. 이쯤 되면 테러범의 조건에 부지런함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무기를 가지고 있대도 아침잠이 많다거나, 밤잠이 많다거나, 추운 날을 싫어한다거나, 더운 날을 싫어하면, 테러할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는 거였다. 나는 테러범에게 공포라기보다는 존경심이 들기까지 했다.
  어르신, 그거 진짭니까?
  네에.
  정말로요? 정말 진짜예요?
  네에.
  어디서 났대요? 훔치기라도 하신 거예요?
  네에.
  선생님은 재차 묻는 말에도 모조리 친절히 답했다. 21번 아저씨는 말도 안 된다며 15번 여자에게 목을 빼고 속닥거렸다. 속닥거리는데 그게 나한테까지 다 들렸다. 선생님은 들었을까 싶어 슬쩍 보니 영 상관없어 보이는 낯이었다.
  15번 여자는 대충 대꾸하는 척 하며 아래로는 휴대폰을 쥐고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걸 보고 있는데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면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심하라는 제스처 같은데, 도통 뭘 안심하라는 뜻인지를 몰라 가만히 마주하고만 있자 여자가 휴대폰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문자 창이었다. 아무래도 경찰에 문자를 보낸 모양이었다. 15번 여자가 조용히 휴대폰을 다시 뒤집었다. 굳이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승객들의 휴대폰을 관리할 생각이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저, 기사님. 기사님은 그냥 운전하세요.
  선생님은 인자한 말씨로 넌지시 말한다. 안전운전이 중요하니까. 옳은 소리를 덧붙인다. 기사는 대꾸도 없는데, 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앉아서 안전벨트를 한다.
  누가 먼저 이야기 해볼래요?
  바깥 팔걸이에 양 팔뚝을 올리고, 선생님은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멀찍이서 드럼 소리가 울렸다. 귀가 어두운 건지, 자고 있는 사람은 테러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건지, 명확한 기준을 알려주지 않은 선생님은 나와 15번 여자, 21번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할뿐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양털 조끼 밑단을 슬쩍 잡아당겼다. 촉감이 매우 좋았다. 가짜일 게 분명하지만,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양의 털을 만지는 것처럼 만족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검지와 중지의 끝으로 계속 문질렀다. 선생님이 내 쪽으로 돌아보고 있는데도 조금 더 문지르다가 손을 뗐다.
  제가 말해볼게요.
  15번 여자의 눈이 커졌다. 오늘 처음 본 사이라, 이번에도 역시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예상해보건대 왜 쓸데없이 나서느냐 정도의 의사 표현이 되겠다. 21번 아저씨는 턱을 까딱거리며 한 번 말해보라고 부추겼다. 선생님이 부드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선생님의 눈길이 닿지 않을 만큼 조심히 손을 뻗어 양털 조끼 밑단을 만지작대면서 말했다.
  저는 호박 알레르기가 있는데요.
  저런, 그 맛있는 걸.
  지금 강릉 호박죽 맛집에 가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은 내가 밑단을 만질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손뼉을 쳤다. 강르응, 호박죽, 마아앗집. 중심축이 고장 난 오뚝이 같았다. 선생님은 단어를 늘여 읽으며 계속 웃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강르응, 호박죽, 마아앗집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호박 알레르기를 가진 사람이 일 때문에 호박죽 맛집을 찾아 나선다는 거였고, 나는 아직 강릉 호박죽 맛집에 가는 이유가 일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발성이 훌륭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28인승 버스 안을 쩡쩡 울렸다.
  패스!
  선생님은 하도 웃어 찔끔 나온 눈물을 찍어내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저 패스라고요?
  예스, 패스!
  선생님의 조끼 밑단을 붙잡고 그럼 나는 이제 안 죽는 거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다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브 콜스.

  5.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사람은 베끼면서 크는 거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세상 자체는 누가 티 안 나게 잘 베끼는가를 겨루는 대결의 장이 되는 거죠. 그 대결의 장에서 우린 살아남은 겁니다. 케이블에서 교양 시청률 3퍼센트라니, 정말 살아남은 거예요. 모두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잘해봅시다. 건배사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로 하겠습니다. 선창하겠습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를 찾는 목소리가 고깃집 안에 힘껏 울려 퍼졌다가 수그러들었다. 정말 모방 씨가 창조를 그렇게 키웠을까. 나는 소주를 마시는 척 소리만 내고 도로 내려놓은 뒤 모방 씨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창조를 키울 생각이 없었을 것이었다, 모방 씨는. 창조가 자식은 맞을까. 이 또한 아무리 생각해도, 창조의 어머니라기보다는 창조와 애인 사이였다거나, 전 애인 사이였다거나, 전전 애인 사이였다거나.
  윤정 씨가 고생 진짜 많았어요.
  그래도 어쨌건 모방 씨는 부자였겠지. 돈 많이 벌었겠지. 그러는데 옆자리 막내가 내 허벅지를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내려다보니 이번엔 검지를 쭉 펴 건너를 가리켰다. 공 피디가 나를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그쵸? 윤정 씨. 며칠 밤도 새고 그랬잖아.
  들어보니 이전의 말과 이어지는 모양인데, 이젠 버릇이 된 것처럼 귀에서 대강 튕겨내 버렸는지 그 전 이야기는 듣지를 못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고생은 피디님이 더 하셨죠, 했다. 그리곤 곧장 막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예진이도 고생 참 많이 했는데. 너 저번에 생일이었는데도 집 못 가고 사전 조사하러 갔다며. 근데 그때 시청률 잘 나왔잖아. 그때 뭐 했지? 뭐였지? 돼지고기 무한리필이었나? 곱창인가?
  돼지고기, 돼지고기.
  분명 막내가 입을 벌렸는데 대답은 남자 목소리로 돌아왔다. 막내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렇다고, 돼지고기라고, 핫핫 웃었다. 대신 대꾸한 공 피디가 나중에 우리 팀원 다 같이 한번 가보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들을 했다. 공 피디는 샐쭉 웃는 얼굴로 쌈을 쌌다. 저 불쌍한 새끼. 웃음이 나는구나. 너 무시당했잖아, 불쌍한 새끼. 입을 다물고 혀를 찼다. 막내가 잘 익은 고기 두 점을 내 몫의 파채 위에 올려주었다.
  서빙을 하던 아주머니가 바구니에 한가득 상추를 넣고 다가오다, 미끄러졌는지 옆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그 바람에 가장 위에 있던 상추 한 장이 매가리 없이 날아가 공 피디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최선을 다해 공 피디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일제히 왁자지껄한 웃음으로 변했다. 공 피디는 반들반들한 정수리에 느닷없이 와 닿은 풀떼기의 정체를 정말 모르는 건지, 얼굴이 시뻘게져서 웃는 막내에게 물었다.
  왜 웃어요?
  그게 아니라.
  막내는 코 먹는 소리를 내며 입을 틀어막다가 자기 정수리 위를 만지작거렸다.
  머리 간지러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막내는 이번엔 상추 하나를 집어 제 머리 위에 대고 흔들어댔다. 상추에 묻어있던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튀겼다. 그중 하나는 내 눈가로 떨어졌는데, 앗, 하며 눈가를 비벼 닦자 이번엔 공 피디의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울어요? 윤정 씨는 너무 웃기면 우는 타입인가보다.
  난 웃기면 웃어, 새끼야.
  생각하며 눈을 비비는데 일순간 소음이 사라졌다. 이상해서 귀를 후벼보려고 손을 내리자 이번엔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목 뒤가 오싹해졌다. 원래부터 멀쩡했다는 듯, 나의 청력은 옆에서 꼴딱 넘어가는 막내의 침 소리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다.
  아아, 윤정 씨는 그, 웃기면 웃는 타입. 오케이. 웃기면 웃는 타입.
  공 피디가 정수리 위의 상추를 잡아 내리며 웃었다. 정수리에 묻은 물방울이 관자놀이 옆으로 흐르는 게 빤히 보였다. 공 피디가 웃자 팀원들 또한 점차 웃기 시작했다.
  웃기면 웃는 타입!
  공 피디 옆자리에 앉은 메인 작가가 소주잔을 허공에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엔 소주잔이 여기저기서 점차 허공으로 떠올랐다. 공 피디는 소주잔을 가장 높이 들어 올렸다. 메인 작가가 한 번 더 말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대답했다.
  웃기면,
  웃는 타입!
  소주를 삼키는 몇 초가 지나자 사방이 금세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반쯤 차있는 소주잔을 내려다보았다. 이걸 마셔야만 한다는 난데없는 책임감이 들었다. 소주잔을 잡으려는데 누가 어깨를 두드렸다. 상추 아주머니였다. 손엔 소주를 두 병 들고 있었는데, 그걸 흔들며 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다.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저희 테이블, 소주 더 안 시켰어요.
  내 말에 대한 대답인지도 모를 만큼 아주머니는 일관된 표정으로 계속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나는 구부렸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주머니도 조금 더 몸을 숙이고 입가를 내 귀에 가까이했다.
  저기, 우리 티브이 나오는 거야?
  네?
  여기 생생정보라며, 생생정보.
  아, 생생정보가 아니라요. 생생한 정보들 팀이에요.
  생생정보 아냐, 생생정보?
  아뇨. 생생한 정보들.
  생생한?
  생생한! 정보들!
  그거 케이비에스에서 하는 거 아냐? 여섯 시 반에?
  저흰 케이블이에요.
  아주머니가 고개를 뒤로 빼고 바로 섰다.
  짜가였어?
  멀찍이 떨어졌는데도 목소리가 잘 들렸다. 원래부터 그렇게 말할 줄 알았던 사람 같이 명확하고 커다란 발음과 목소리였다. 아주머니는 소주 두 병을 도로 가져가 냉장고 안에 넣었다.
  윤정 씨, 한 잔 받아요.
  냉장고 바깥인지 안쪽인지 모를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쳐다보고 있는데 바로 뒤쪽에서 공 피디 목소리가 났다. 돌아봤더니 자리를 옮긴 건지, 막내가 반대편에 가 있고 공 피디가 막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공 피디는 소주병을 흔들며 내 잔을 턱짓했다. 나는 아직도 반이 차있는 소주잔을 들어 내밀었다. 공 피디는 아주 잠깐 병을 기울이곤 거둬갔다. 여전히 잔엔 소주가 반만 차있었다.
  아직 반이나 있는데 더 따르면 윤정 씨 힘드니까.
  공 피디는 그러면서 제 잔에 소주를 꽉 채워 따랐다. 건배하자는 듯 내 앞까지 가져왔다가 갑자기 멈췄다. 윤정 씨, 하고 자그만 소리로 불렀다. 언제 어디서나, 그 정도 크기라면 쉽게 묻힐 법한 목소리로.
  저는 윤정 씨랑 같이 일해서 너무 좋아요.
  다시 보니 상추를 머리에 얹었을 때보다 낯빛이 붉었다. 쪽팔린 건 아는지 그새 술을 더 마신 모양이었다. 공 피디는 소주잔을 들고 자꾸 말했다. 허공에 들린 잔에 꽉 찬 소주가 쏟아질 듯 출렁거렸지만, 그저 계속 출렁거릴 뿐 쏟아지진 않았다.
  저는 정말루 열심히 살고 싶거든요. 근데요, 제 옆에 열심히 일 하는 윤정 씨가 있어서 정말 든든합니다. 정말 든든해요.
  공 피디는 이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생생한 정보들. 윤정 씨 없었으면 이렇게 회식도 못했을 거고, 시청률도 안 나왔을 거고……. 전 열심히 사는 사람들 정말 좋아하는데요, 그중에 윤정 씨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요. 그 열심히라는 게……
  공 피디는 열심히 열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열심히라는 게요,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요. 공 피디의 의견에 아무런 대꾸도 않은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건너의 막내와 눈이 마주쳤다. 막내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입 모양으로 피디님 우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거리자 경악하곤 옆자리에 귓속말하는 게 빤히 보였다.
  윤정 씨, 고맙습니다.
  공 피디는 코를 크게 먹으며 건배하려다가 또 멈췄다. 나는 잔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를 짚고 눈물을 참았다. 공 피디는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내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공 피디의 소주가 그제야 넘쳐 내 무릎 위에 후두둑 쏟아졌다. 소주가 쏟아진 걸 정말 모르는 건지, 얼어 죽을 개그 욕심 때문에 그러는 건지, 공 피디는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윤정 씨는 슬프면 우는 타입.

  6.
  그렇거든요. 내가 그런 타입이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내가 얼마나 눈물을 참으려고 애를 써댔는지, 참, 감격스러워서……. 내가 십 년을 이걸 했거든요? 진성 목욕탕, 월드 사우나, 현대 사우나, 지금 일하는 데 포함해서 십 년을 주구장창 사람 때만 보면서 살았다는 거죠. 근데 와, 그날 그 손님은 정말 엄청났어요. 그 정도로 때 잘 나오는 사람은 머리털 나고 처음 봤다니까. 일단 이 때밀이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가 좀 필요할 거야. 이게 단순히 때를 밀어주는 일이 아니거든요. 내가 있죠, 직업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것도 엄연히 기술직이거든요. 경험에 의한 기술직. 나는 또 이 일이, 그냥 몸에 있는 더러운 걸 밀어준다기보다는, 마음을 밀어주는. 예? 번들번들해진 사람들이 어우, 시원하다, 하면서, 세상만사 걱정 없는 얼굴로 개운하게, 종종걸음으로 나가는 모습 보면 그게 얼마나 뿌듯한 줄 아십니까? 나는 때를 벗겨주면서 그 사람네들의 근심.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런 걸 총체적으로, 예? 아주 열심히 해소시켜 주는 거죠. 그때 그 사람이 저한테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살면서, 자기는 살면서 이렇게 시원했던 적은 처음이라고, 고맙다는데, 고맙다면서……
  휴게소 그냥 지나칠게요.
  감격에 찬 얼굴로 양손을 모으던 21번 아저씨의 말문이 막혔다.
  터미널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남았습니다.
  싸구려 마이크로 전달되는 음성은 원래의 것보다 지저분하고 둔탁하게 울렸다. 마이크가 싸구려일 뿐인데 사람 목소리까지 그렇게 느껴졌다. 21번 아저씨가 왜 말을 하고 있는데 끊느냐면서 윗입술을 들썩거렸다. 선생님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기사님.
  예.
  휴게소는 들러야죠. 방광이 터질 수도 있으니까요.
  기사가 마이크에 대고 숨을 뱉으며 웃었다. 한 번 그러는 게 아니라, 자꾸만 거기에 대고 숨을 뱉어내면서 웃었다. 파, 파,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기사는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말했다.
  누가 도망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선생님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도 전에 21번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서 기사에게 삿대질했다.
  아니, 지금 우리가 도망갈 것 같다는 겁니까?
  아저씨는 허리에 손을 얹고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보냐느니, 도망갈 생각 하는 사람들 여기에 한 명도 없다느니, 침을 튀기면서 화를 냈다. 차선이 바뀌는지 버스가 살짝 흔들렸다. 아저씨는 비틀거리다 얼른 앞 의자를 부여잡곤 다시 앉았다.
  여기서 누구 도망갈 분 있어요?
  선생님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18번 학생은 여전히 자고 있었고, 21번 아저씨는 열심히 고개를 저어댔으며, 15번 여자는 이제 대놓고 휴대폰을 했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봤는데, 정수리에 시선이 내려앉는 걸 알면서도 그저 양털 조끼 밑단만 만지작댔다.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사를 보며 아무도 없네요, 했다. 갑자기 엉덩이 쪽이 간지러워 잠시 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놓고 긁는 건 민망하니 오른손으로 간지러운 부분을 툭툭 두드리는데 백미러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멀찍이 있어 잘은 안 보이지만 분명히 나와 마주친 눈이었다. 어지간히도 피곤해 보이는 눈. 밑이 시커먼 게 적어도 이틀은 못 잤겠다 싶었다.
  손든 건가요?
  저 사람이 혹시 졸음운전을 하진 않을까, 염려하며 계속 쳐다보지 않았다면 나에게 말을 거는지도 몰랐을 거였다. 주춤주춤 검지를 펴 나를 가리키며 저요, 하고 되물었더니 기사가 고개를 두 번 끄덕거렸다.
  손 안 들었는데요.
  안 들었어요?
  네.
  기사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곤 바로 대답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왜요?
  예상 도착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면 컴플레인 걸려요.
  여기서 컴플레인 걸 사람 있답니까? 지금 내가 보니까 여기 사람들 다 착해. 다 착해가지고 컴플레인 그런 거 안 걸어요. 그러니까 휴게소 내려줘요.
  안 됩니다.
  하, 거 희한한 양반일세.
  어디 희한한 양반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자면서, 21번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운전석 쪽으로 갔다.
  배 아프지 않아요?
  네?
  배탈 난 것 같던데. 화장실 가야 할 건데.
  선생님이 자리에 앉는 나를 보며 물었다. 고개를 저었더니 내 가방 위를 토닥거렸다. 너무 아프면 말하래서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대답해놓고서야 조금 전 삼다수 500밀리리터의 뚜껑 때문에 배를 문질렀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끼를 잡아당기며 선생님을 불렀다.
  저…… 선생님.
  아무래도 이 중에 누군가는 방광이 터질 거라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선생님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며 선생님의 얼굴을 살폈다. 선생님은 웃는 입매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퍼를 닫으면서 말을 꺼냈다.
  저는 아이비에스 궁금한 이야기들 더블유 에이치 와이 작가, 김윤정이라고 하는데요.
  명함을 건네는 대신 손을 뻗어 허벅지 위에 고이 놓인 선생님의 왼손을 잡았다.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네에?
  아이비에스라고, 케이블 채널인데요. 선생님 혹시 비티비 쓰세요? 거기서 틀면 102번인데. 아직 방영 시작은 안 했고요. 다음 달부터 토요일 저녁 여덟 시에, 지금 하는 백일의 야사 종영하면 시작하는 미스터리 시사 교양,
  이름이 뭐라구요?
  김윤정입니다.
  윤정 킴.
  선생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놓고 수첩의 빈 페이지를 폈다. 볼펜으로 테러범 할머니 그녀의 식스틴, 이라고 적으며 말했다.
  우선 가는 동안만 간단히 선생님이 왜 테러를 저지르려 하시는지에 대해 여쭙는……
  이런, 빌어먹을.
  멀찍이서 기사의 욕설이 들려왔다. 15번 여자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빼고 기사를 쳐다봤다. 물론 나 또한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선생님께선 어디 사는 누구인지부터 말씀해주시면 된다고 말했다. 선생님 또한 역시 침착하게, 서울 도봉구 쌍문 3동 122 다시 4번지에 산다고 대답했다. 수첩 위에 주소를 빠르게 휘갈겨 쓰다 번지수가 생각나지 않아 여쭤보려 고개를 들었다. 기사의 욕지거리보다 더더욱 멀찍이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개새끼가 경찰에 신고했어.
  선생님 너머로 보이는 15번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경찰이라니. 지금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경찰차 소리란 말인가. 조금 전 15번 여자가 보낸 문자에 대한 접수를 받고 출동한 걸까. 그렇다면 지금 주소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팔뚝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선생님, 테러는 처음이신가요?
  지금 개새끼라고 했어, 이 개새끼야? 컴플레인 걸리고 싶어?
  그래, 이 개새끼야. 개새끼들아.
  기사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치기까지 하며 욕을 했다. 옆에 잘 걸어놓았던 마이크를 거칠게 빼내고 입가로 가져오다가 이를 부딪쳤는지, 스피커 너머로 둔탁한 파열음과 이 씨팔 존나게 아프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버스가 거칠게 요동쳤다. 선생님은 벨트를 했는데도 쉽게 중심을 잡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몸이 양옆으로 마구 흔들렸다.
  9810, 9810. 지금 당장 정차하세요.
  어떤 새끼가 신고했어!
  싸구려 마이크를 타고 흐른 음성 두 개가 번갈아 째져서 들려왔다. 창을 내다보니 경찰차 한 대가 옆에 바짝 붙어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경찰이 창을 내리고 운전석을 향해 삿대질 했다. 재차 정차하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데에 반해 버스의 속도는 점점 높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옆에 붙었던 경찰차가 점점 뒤로 밀리는 걸 보니 실제로 속력이 올라가긴 한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15번 여자가 벨트를 풀고 벌떡 일어났다. 손에 든 휴대폰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조금 전 선생님께서 총을 높이 들었던 것과 비슷한 자세였다.
  한 모 씨!
  15번 여자가 휴대폰을 든 손으로 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21번 아저씨가 마이크 소리보다 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18번 학생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경찰차가 한 대가 아닌지, 여러 개의 사이렌 소리가 한 데 섞여 들렸다.
  한 모 씨요?
  저거 한 모 씨. 한 모 씨, 한 모 씨, 범인!
  15번 여자는 무척 흥분한 어투로 삿대질을 하며 한 모 씨, 범인, 살인, 한 모 씨,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저 세 단어를 다양한 방법으로 조립하기 위해 집중을 시도했다. 기사가 마이크에 대고 바락바락 여러 종류의 욕설을 뱉어냈다. 버스는 더욱더 격렬하게 비틀거렸다. 범인이 살인을 한 모 씨 했다. 한 모 씨가 살인을 범인 했다……
  이 개새끼들!
  엔진소리가 점점 크기를 키웠다. 나는 개새끼를 찾는 저 ‘한 모 씨’를 인터뷰해야 하는지, 내 옆에서 하릴없이 흔들리는 ‘테러범’을 인터뷰해야 하는지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멎은 줄도 몰랐던 드럼 소리가 다시 아득하게 들려왔다.
  선생님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여전히 차량은 기사의 의지에 따라 여러 차선을 넘어 다니고 있었다. 양쪽 팔걸이를 단단히 붙잡은 선생님이 창밖을 쳐다봤다. 선생님의 오른쪽 뺨에는 아직도 마름모꼴의 베개 자국이 배어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양털 조끼 밑단을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바로 위에 있는 주머니에 든 총이 들썩거리며 내 손등 뼈를 두드렸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조끼를 만지지 않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공 피디였다.

 

3·15 청년 문학상 단편소설 본심 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작품 다섯 편은 다들 상당한 수준의 성취도를 보여준 수준작들이었다. 선자는 ‘3·15 청년문학상’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심사기준으로 새로운 세기를 헤쳐 가는 청년다운 패기와 감수성을 앞세우기로 했다.

  산업재해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상수’와 환경문제를 다룬 ‘푸줏간새’가 먼저 선에서 제외되었다. ‘상수’는 소설의 구성에 대한 공부가 아직 덜 여문 데다 부정확한 문장도 자주 눈에 띄었다. ‘푸줏간새’는 박제사라는 드문 직업을 소재 삼은 점이 눈에 띄었으나 설득력 있는 상황묘사보다는 설명조의 문장에 의존한 점이 눈에 걸렸다. 청년 취업 문제를 한 작품에 제기함으로써 주제의 초점이 흐려진 대목도 아쉬웠다.

  불임의 중년 여성을 화자로 내세워 여성문제를 다룬 ‘인형’은 안정된 문체와 정제된 구성이 호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 안정성이 역설적으로 약점으로 부각되었다. 젊은이다운 패기보다는 기성 소설가의 작품 같은 익숙함이 아쉬웠다는 뜻이다.

  남은 두 작품 중 보드게임 카페에서 의미 없는 게임을 하는 두 남녀를 등장시킨 ‘조개껍데기를 뒤집어쓴 소녀’는 출구 없는 미로를 헤매는 젊은 세대의 자화상을 비교적 경쾌한 문체와 신선한 감각으로 그려낸 점이 호감을 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다시 말해 주제의식이 선명치 않은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달려가고 있으므로’는 케이블 방송 작가가 취재여행을 가는 고속버스에서 할머니 테러범에게 인질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일종의 세태소설이다. 세련된 문체는 ‘조개껍데기…’보다 한 수 위다. 회전목마를 탄 듯 빠른 시선으로 경박한 세상을 스쳐 가는 경쾌한 묘사기법으로 소설적 위트를 잘 보여준다. 꽁트적인 마무리가 아쉬움을 남겼으나 삶의 단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단편소설의 특성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최종 선정했다.

  이 기회를 빌려 청년작가들에게 당부하자면 동세대의 아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 줬으면 하는 것이다.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란 평범한 진리를 숙고해 주기를 바란다. 당선작가에게 정진을 당부드리며 아쉽게 선에 들지 못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격려를 전한다.

강동수(소설가)


3·15 청년 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소감

  떠오르는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덕분에 제가 언제든, 계속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목적지를 향하여 멈추지도 못하고 달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출발하게 되었으므로 가야만 하는 일은 딱히 별일도 아니었고 어쩌면 그래서 더 별일 같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별일도 아니라 별일인 이야기들을 궁금해 하고 고민하고 또 써내리고 싶습니다. 저와 제 세상의 고마운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잘 돌보며, 마냥 괴롭지만은 않게 어쨌든 달려가겠습니다.

  읽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합니다.

김유진(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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